시집의 쓸모
손 택 수
벗의 집에 갔더니 기우뚱한 식탁 다리 밑에 책을 받쳐놓았다
십 년도 더 전에 선물한 내 첫 시집,
주인 내외는 시집의 임자가 나라는 걸 아는지 모르는지
차린 게 변변찮아 어떡하냐며
시종 미안한 얼굴이다
불편한 내 표정에 엉뚱한 눈치를 보느라 애면글면,
차마 말은 못하고 건성으로 수저질을 하다가
(아마도 복수한다는 생각이었을 것이다)
생각해보니, 시집이 이토록 쓸모도 있구나
책꽂이에 얌전히 먼지를 뒤집어쓰고 있기 보단
시집도 시도 시인도 다 버리고
한쪽 다리가 성치 않은 식탁 아래로 내려가
균형을 잡고 있는, 국그릇 넘치지 않게
평형을 잡아주는, 오래전에 절판된 시집
이제는 표지색도 다 닳아 지워져가는 그것이
안주인 된장국마냥 뜨끈하게 상한 속을 달래주는 것이었다
*제14회 미당문학상 수상작품집, 최종후보작 중에서(중앙일보 문예중앙)
시집이 쓸 모가 없고, 그래서 시를 쓰는 일이 쓸모가 없다고 느껴지는 것은
그것이 밥이 되지 않기 때문이 아니라 관심에서 멀어졌기 때문일 것이다.
관심받지 못하는 일을 하는 것은 정말 맥빠지는 일이다.
누구도 들어주지 않는 음악, 보아주지 않는 그림, 들어주지 않는 말, 읽어주지 않는 책,
그리고 아무도 관심가져주지 않는 삶...
우리는 가끔 한 길을 우직하게 걸어온 사람이 어떤 계기로 스포트라이트를 받게 될 때
한층 열광하게 된다.
마치 죽은 줄 알았던 사람이 살아 돌아온 것처럼...
왜냐하면 그런 내면에는 어떻게 포기 하지 않고 지금까지 왔을까?, 하는 존경심 때문일 것이다.
관심가져주는 일...
어쩌면 이것이 지금 세상에선 사람에게 베푸는 선행이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드는 아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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