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

물을 건너며 / 박형준

kiku929 2015. 2. 7. 19:21

 

 

 

 

물을 건너며

 

 

박 형준

 

 

 

 

세월이 빠져나간 거리마다 아팠다

물을 건너며

나보다 한걸음 빠른 정적을 생각했다

그것은 물보다 먼저,

흘러간 절망감이었다

 

고요와 적막 속에서 훨씬 날이 어두워졌다

먼 바다에서는 바위틈에 갇힌 파도가 죽으며 말라갔다

내 음습하고 침침한 구멍 속에는 여전히 빛이 남아,

핏줄처럼 배고픔이 선명하게 꿰뚫고 지나갔다

빛은 가장 어두운 곳에서 사는 듯싶었다

 

'내일이 멀었다'라고 말하는 당신의 가랑이 사이로

빠르게 달디단 뱀의 혀 같은 희망이 날름거린다

물을 건너며,

나는 남은 빛을 품고 꼽추처럼

내 품에 들어가 자는

낯선 정적 하나를 사랑하게 되었다

 

 

 

*시집 <빵냄새를 풍기는 거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