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덟개의 악기가 뒤섞인 크로스오버적인 방의 공기 알갱이를 흡입한 기록들
정재학
1. 아코디언
녹아 흐르는 몇개의 음들
사이로 집시 아이들이
슬픈 멜로디에도 춤을 춘다
집시의 손가락 끝에서 흐르는
붉은 강물
흩어지며 지평선으로 집중된다
2. 피아노
열개의 손톱이 잠들어도
빛이 사라지지 않는다
백야와 열대아를 동시에 질주하는
작은 열차
모든 역마다 키스하는 소리가 울렸다
3. 트펌펫
철의 입술, 나팔꽃
두개의 아가리
구름 먹은 내 두 눈으로
오래된 우표들이 날아들고
노란 숨소리, 내 눈동자에 콜록콜록 맺힌다
4. 기타
한 여자가 연주되자
내 몸통에 구멍이 뚫리고
그녀의 머리카락만큼 풍성한
갈색 바람이 불었다
꼭 절정이 없어도 상관없었다
5. 풍금
어린 음들 가슴까지 차오르고
무디게 느리게 걷는다
나는 점점 땅속으로 잠기고
나무가 되어갔다
하늘에는 물먹은 털실 뭉치 같은
달 몇개 떠오르고
바람 부는 새벽은 며칠 동안 계속되었다
달마다 푸른 물이 뚝뚝 떨어졌다
6. 첼로
무거운 음들
심장을 베어나간다
비로소 공기의 알갱이가 되어
숨을 쉴 수 있었다
핏물이 고여 빠져나가지 못했다
7. 콘트라베이스
音階. 音界
가장 낮은 곳으로
둔탁하고 평화로운 연못
응고된 아침
구겨진 눈동자
서서히 부풀어 오른다
8. 아쟁
초승달이 흘리는 일곱 줄을 건드리자
내 손은 개나리 가지가 된다
현(鉉)에서 베어 있는 낮고 거친 음을 만져본다
노파의 눈물
흩어진 음들 모이더니 울림통을 뚫고
진양조장단의 술로쏟아진다
*정재학 시집 <모음들이 쏟아진다> / 창비 (2014)
*
눈에 보이는 소리들...
여덟개의 악기 소리에 취하는 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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