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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회 <형평문학상>수상자 김영승 시인과의 대담 중에서

kiku929 2016. 8. 16. 10:53







저한테는 대개가 자호(自號)인 무수한 호 (號)가 있는데 그 중의 하나가 삼이당(三異堂)입니다. 나는 세 가지가 다르다.

즉, 나는 노는 물이 다르고 가는 길이 다르고 꾸는 꿈이 다르다, 그래서 나 잘났다는 것이 아니라, 그래서 할 수 없다,

그렇게 자경 (自警)의 의미로 붙인 그 삼이당을 놓고 아니 잘났다까봐 삼이당이 뭐냐 그냥 삼 자 들어간 아무거나 붙이자 그럼

삼식이가 좋겠다 해서 그냥 삼식이라고 붙인 것입니다. 그리고 나니까 참 편하고 행복했습니다.


대분망천(戴盆望天), 즉 머리에 물동이를 이고는 하늘을 우러러 볼 수 없다. 그것 아닙니까?

머리에 권위라는 위선이라는 탐욕이라는 물동이를 이고 있는 한 절대로 하늘을 우러러 볼 수 없습니다.

그 물동이를 내려놓아야만 땅도 굽어볼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허리를 굽혀 인사할 수도 있는 것입니다.

맹자처럼 "하늘을 우러러 부끄러움이 없고 땅을 굽어보아 역시 부끄러움이 없다면

그것이 인생의 두 번째 낙" (仰不愧於天 俯不怍於人, 二樂也)이 아니라 그냥 하늘을 우러러 볼 수 있고 땅을 굽어볼 수 있으면

그저 "그러면 됐다" 저는 중얼거릴 수 있는 것이지요.


여러 지면에 몇 번 썼습니다만, "시인이 위대할 수 있는 근거가 혹시 있다면, 그것은 시인은 자신의 장점, 아름다운 점뿐만이 아니라 약점,

한계, 모순, 모자름, 실수, 죄, 나아가서는 자기 자신의 추악한 구석까지 시로 다 고백을 할지언정 자기 자신을 위한 변명은

시로는 안 한다는 것이다" 그런 적이 있는데, 야스퍼스의 용어인 그 '도덕적 천재'를 저는 그렇게 원용한 것입니다.


소크라테스 이후 서구철학은 오랫동안 감성에 대해 이성이 우월하다는 소위 이성우월주의의 입장을 고수해 왔는데

 감성과 이성은 따로 떼어서는 존재할 수 없는 것임은 시가 증명하며 그 앞길을 인도합니다.

이성이라는 미명으로 포장된 개인적 혹은 집단적 사기극이 좀 많았습니까?


공감은 곧 위로이며 에너지입니다. 그 에너지는 자신의 행동을 결정할 수 있게도 합니다. 


성 아우구스티누스, " 이미 간 것과 아직 안 간 것을 떠나, 간다고 할 때 간다고 하는 것이 없다" (離已去亦未去,去時亦無去)하는

불교적 시간관은 직선화된 물리적 시간관을 부인하기에 그러한 시간관에 의하면 시간은 흐른 게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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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과 공간은 칸트의 시공논증 이래, 아니 그 이전부터 난제이지만, 마르셀 프루스트처럼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라면 그 시간을

어디에 잃어버렸으며, 그리고 뭐 하러 찾는가, 그리고 찾는다고 찾아지는가,

만약에 잃어버렸다면 잃어버린 것은 잃어버린 것으로 놔두어야 하는 것 아닌가 하는 중얼거림이 오히려 그 시간과 공간에 대한

 신비주의적 직관을 가능케 합니다.



저의 앞으로의 목표는 옛날처럼 다시금 잘 까부는 것입니다. 김영승 그 모습 그대로 사는 것을 저는 까분다고 합니다.

그런 까부는 삶은 거창하게 말하면, 거창할 것도 없습니다.

아주 쉽게 말하면, 소위 화엄삼매 혹은 해인삼매와 같은 그럼 삶을 말하는 것입니다.


* <형평문학상 수상작품집>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