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의 거처
조용미
처음의 꽃이, 지고 있다
저 커다란 흰 꽃은 오래도록 피어 천 년 후엔 푸른 꽃이 되고 다시 천 년 후엔 붉은 꽃이 된다 하니
고독에 침몰당하지 않기 위해 백 년을 거듭 기다리는 동안
우리는 차츰 각자의 색을 갖게 되는 것이다
늦은 가을이 계속되는 지난 수십 년 동안 나는 깊이 감추어 둔 쇄쇄록(瑣瑣錄)에 생의 모든 사소함을 기록하며
기다긴 계절의 무서움을 이겨 냈었다
모든 것이 반복되어도 생은 아름답구나
여러 생이 모여 높고 낮고 넓고 깊은 하나의 音이 이루어질 것이므로
새는 천 년을 살다 죽을 때가 되면 악곡을 연주하며 열락의 춤을 추다 불 속으로 뛰어든다 그 재에서 한 개의 알이 생겨나 다시 생을 받게 된다
그 새는 다시 무엇이 되지 않는 불사조이니 불사는 아름다움과 멀어지는 불행이므로
봄은 계속되지 않았다
마음이 아득하면 머무는 곳도 절로 외지게 되니* 당신의 거처 또한 묘연하여 물소리 깊고 구름이 높았다
다시, 꽃이 떠 있는 이름 봄이다
-조용미 시집 『나의 다른 이름들』(민음사,2016)중에서
'불사는 아름다움과 멀어지는 불행이므로'
아름다운 것의 속성은 영원하지 않다는 것에 있다
유한성은 그래서 이미 아름다움의 전제이다.
생이 아무리 고달퍼도 순간순간 다가왔다 멀어지는 것들의 아름다움을
놓쳐서는 안 된다.
아름다운 것은 늘 오고 또 간다.
물론, 영원히 다시 오지 않는 그 어떤 것도 있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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