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

반성 743 / 김영승

kiku929 2016. 12. 15. 21:16




                                                                                                     터널은 직선에 대한 인간의 욕망이다




반성 743




김영승




키 작은 선풍기 그 건반 같은 하얀 스위치를

나는 그냥 발로 눌러 끈다


그러다 보니 어느날 문득

선풍기의 자존심을 무척 상하게 하고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정말로 나는 선풍기한테 미안했고

괴로왔다


    ― 너무나 착한 짐승의 앞이빨 같은

      무릎 위에 놓인 가지런한 손 같은


형이 사다 준

예쁜 소녀 같은 선풍기가

고개를 수그리고 있다


어린이 동화극에 나오는 착한 소녀 인형처럼 초점 없는 눈으로

'아저씨 왜 그래요''더우세요'

눈물겹도록 착하게 얘기하고 있는 것 같았다


무얼 도와줄 게 있다고 왼쪽엔

타임머까지 달고

좌우로 고개를 흔들 준비를 하고 있었다


이 더운 여름

반 지하의 내 방

그 잠수함을 움직이는 스크류는

선풍기


신축 교회 현장 그 공사판에서 그 머리 기름 바른 목사는

우리들 코에다 대고

까만 구두코로 이것저것 가리키며

지시하고 있었다


선풍기를 발로 눌러 끄지 말자

공손하게 엎드려 두 손으로 끄자


인간이 만든 것은 인간을 닮았다

핵무기도 십자가도

콘돔도


이 비 오는 밤

열심히 공갈빵을 굽는 아저씨의

그 공갈빵 기계도.



-김영승 시집 『반성』중에서 /(민음사,1987)

   






*

시집 『반성』은 1987년에 초판 인쇄되었다. 만 30년 전이다.

'인간이 만든 것은 인간을 닮았다'라는 문장은

과학기술의 발달과 더불어 인간과 기계가 공존하게 되는 미래 사회에 대한 경고라고 할 수 있다.

-물론 이 시가 쓰여진 시점에서는 미래가 되겠지만 지금은 현재라고 해야되겠다.-

기계를 만드는 것은 사람이지만 그 기계를 만들면서도 사람을 생각하지 않으면 안되는 것은

사람은 그 기계를 닮아가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기계는 무기체이기는 하지만 사람과 공존하는 기계는 유기체적 성격을 갖게 되는 것이다.

지금 나는 스마트폰을 편리하고 유용하게 사용하고 있다. 

길찾기며 버스나 전철 시간이며 정보 검색, 세일 상품 등등 하루라도 없으면 생활하기 힘들 것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그러나 마음 한 구석에서는 그 편리함에 대한 두려움이 있다.

내가 스마트폰을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점점 스마트폰에 의해 내가 조정되고 있는 것 같은,

예속되어가는 나를 보기 때문이다

기계는 인간 생활의 편리한 쪽으로 진화되어 왔다고 할 수 있다.

그 편리성 때문에 인간은 자기가 만든 기계에 점점 속박되어갈 수밖에 없으면서

결국 인간의 존재 자체에 위협당하는 상황까지 오고 말았다.

그러나 생각해볼 일이다.

편리해지는 일이 행복해지는 일과 등호관계가 아니라는 것을.

더 빠르고 더 간편하고 더 편리하게... 이러한 가치가 과연 행복과 무슨 연관이 있었을까.

성능이 좋은 가전제품을 들여놓았다고 해서 나의 행복이 커진 것은 아니었다.


'인간이 만든 것은 인간을 닮았다'

이 한 구절이 행복하게 읽히는 날이 오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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