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저녁 인터넷 실시간 검색에 최영미 시인의 이름이 올라와 있었다.
사성급 호텔에 무료로 방을 제공해줄 수 없느냐는요지의 메일을 보낸 것이 화자되고 있었다.
나는 뭐, 그럴 수도 있겠구나 싶었을 뿐 별 관심은 없다.
그러나 그 시인의 생활고, 그러니까 연 소득이 1300만원 정도의 무주택자라서 생활보호대상자라는 이야기였다.
최영미 시인은 문학에 문외한인 사람에게도 알 법한 꽤 이름있는 시인이다.
선운사에 가면 그 시인의 <선운사에서>라는 시비가 세워져 있으니...
책도 많이 저작하고 그 이름이 있으니 도서 매출도 기본 이상은 될 것이라고 여겨졌던 그 시인이 생활보호대상자라는 것은 의외였다.
하긴 어떤 시인 -『문학과 지성』이란 출판사에 시집을 두 권이나 낸-도 일년 총 수입이 백 만원 정도라고 했던가.
문학인, 그중에서도 시인은 특히 가난하다.
시인하면 가난이라는 등식이 성립된 지는 오래전부터다.
그러한 사정은 점점 더 열악해져서 그들이 설 곳이 거의 사라진 것은 사실이다.
시인은 이미 직업이 시인인 사람이다.
직업으로서의 시인으로 살아가겠다고 정한 사람들이다.
그러나 생활고에 시인이 아닌 다른 직업으로 생활을 꾸려갈 수밖에 없다.
전업시인은 현대에선 외계인이라는 말이 실감난다.
물론 시인들은 많다. 시인들이 너무 흔하다는 말도 한다.
그러나 그것은 소위 딜레당티즘으로서의 시인들이 많다는 뜻이다.
나의 선생님은 "시인의 길, 그 길은 아무나 가는 길이 아니다", 라는 말씀을 하신다.
시인이 사라진 세상,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지에 대해 깊이 생각해봐야 한다.
시는 자본의 논리로는 전혀 무용한 세계이다.
그러나 그 무용함이 건재할 때 그 사회는 인간을 이해하는 사회가 될 것이다.
강물에는 그 오염도에 따라 서식하는 물고기의 종류도 달라진다.
시인이 살아갈 수 있는 세상, 아마도 그것은 인간이 살기에 청정한 사회라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
적어도 그 척도는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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