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원
윤동주
살구나무 그늘로 얼굴을 가리고, 병원 뒤뜰에 누워,젊은 여자가 흰
옷 아래로 하얀 다리를 드러내놓고 일광욕을 한다. 한나절이 기울도록
가슴을 앓는다는 이 여자를 찾아오는 이, 나비 한 마리도 없다. 슬프지
도 않은 살구나무 가지에는 바람조차 없다.
나도 모를 아픔을 오래 참다 처음으로 이곳에 찾아왔다. 그러나 나
의 늙은 의사는 젊은이의 병을 모른다. 나한테는 병이 없다고 한다. 이
지나친 시련, 이 지나친 피로, 나는 성내서는 안 된다.
여자는 자리에서 일어나 옷깃을 여미고 화단에서 금잔화 한 포기를
따 가슴에 꽂고 병실 안으로 사라진다. 나는 그 여자의 건강이 - 아니
내 건강도 속히 회복되기를 바라며 그가 누웠던 자리에 누워본다.
- 윤동주, 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중에서
*
병원에 있어보면 안다.
환자를 가장 잘 이해하는 사람은 환자라는 것을.
다른 환자에게서 위로를 받고 희망을 보기도 하지만 내가 또 그러한 위로와 희망이 되어주기도 한다.
여자 환자가 누웠던 그 자리에 누워보는 것,
서로의 건강을 빌면서...
타인이어도 가능한 곳이 병원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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