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

어떤 자리 / 정끝별

kiku929 2010. 1. 13. 19:46

 

                     

 

 

 

   어떤 자리

 

                

                    정끝별



어떤 손이 모과를 거두어 갔을까
내가 바라본 것은 모과뿐이었다
잠시 모과 이파리를 본 것도 같고
또 아주 잠시 모과 꽃을 보았던 것도 같은데
모과 이파리가 돋아나는 동안
모과 꽃이 피어나는 동안
그리고 모과 열매가 익어가는 내내
나는 모과만을 보았다
바라보면 볼수록 모과는 나의 것이었는데
어느 날 순식간에 모과가 사라졌다
내 눈맞춤이 모과 꼭지를 숨막히게 했을까

내 눈독(毒)이 모과 살을 멍들게 했을까
처음부터 모과는 없었던 게 아닐까 의심하는 동안
모과는 사라졌고 진눈깨비가 내렸다
젖은 가지 끝으로 신열이 올랐다
신음 소리가 났고 모과는 사라졌고
모과가 익어가던 자리에 주먹만한 허공이 피었다
모과가 익어가던 자리를 보고 있다
보면 볼수록 모과는 여전히 나의 것이건만
모과 즙에 닿은 눈시울이 아리다
모과가 떨어진 자리에서
미끄러지는 차연(次緣)의 슬픔
이 사랑의 배후

 

 

 

 

어린아이가 갖고 놀던 장난감을 영문도 모르고 빼앗긴 것처럼

어느날 모과가 홀연 사라졌습니다.

그리고 모과가 익어가던 자리에 허공이 매달렸습니다.

그 허공은 모과만 한 것이지만 모과만을 바라보던 사람에겐

바라보는 모든 것이 허공입니다.

 

그래도 사라진 자리는 슬프지만 아름답습니다.

모과가 열리고 사라질 때까지의 내 눈길이 거기,있었기 때문이지요.

 

 

 

'!시' 카테고리의 다른 글

꽃단추 / 손택수  (0) 2010.01.13
이끼 / 나희덕  (0) 2010.01.13
새벽밥 / 김승희  (0) 2010.01.13
겨우내내 움츠렸던 / 조정권  (0) 2010.01.13
주유소 / 윤성택  (0) 2010.01.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