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

녹두 / 강영은

kiku929 2020. 11. 19. 11:42

녹두

 

 

강영은

 

 

어머니가 쑤어 온 녹두죽을 먹는 동안

녹두라는 말이 좋았다

녹두밭 한 뙈기가

헐어있는 입속을 경작했던 것인데

녹두하고 부를 때마다

문드러진 입천장에 콩 알갱이가 돋아났다

녹두꽃 지는 거기가 저승이어서

녹두는 보이지 않았다,

녹두가 너무 많은 곳

녹두가 너무 많아 내가 보이지 않는 곳

나는 어떻게 인간이 되나

녹두를 생각하는 동안

초록이나 연두가 희망을 쏟아냈지만

희망이란

녹두의 유전자를 지닌 말, 가시 돋친

들판의 약속 같은 것이어서

여물지 않은 입안에 가시가 돋고

단단하게 여문 가시가

혓바닥을 찔렀다

눈을 뜨면 젊은 어머니가 앉아 계셨다

녹두꽃만 보이던 그때, 나는

진정 아픈 빛깔에 시중들고 싶었다

젖은 이마의 미열을 짚어내던 어머니처럼

푸르죽죽한 세상을 받쳐 드는

죽그릇이 되고 싶었다

오후 여섯 시에 찾아든 파랑새처럼

녹두밭에 앉고 싶지는 않았다

 

 

-《문학청춘》 (2019, 가을 41)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