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

<물방울의 밑그림>, < 가슴의 환한 고동 외에는> 작품 비교 / 박형준

kiku929 2018. 9. 29. 15:38


물방울의 밑그림



박형준



 잃어버린 바다의 주소록이 한 방울 물방울로 맺혀 있습니다. 가슴의 환한 고동 외에는 들려줄 게 없는 식물의 노래, 식물의 별입니다.

물의 씨앗들이 잠든 물방울은 길 끝에서 만난 저녁의 무늬입니다. 솟구치는 자세로, 막 저녁의 깁고 기운 빛을 입고 날아가는 구름 형상을

한 식물과 만난 밤은 날갯짓도 고요합니다. 똑똑뚜뚜르르르 내부의 가장 깊은 곳 어둠을 쳐 비스듬히 올라온 가지 위로 또 다른 물방울

성좌가 운행합니다. 버리고 버립니다. 물을 찾아 내려오는 짐승들 맑고 찬 눈동자에 떠도는 빛, 떨리는 걸음 하나만 남겨놓습니다. 어느새

사막의 모래먼지 두터운 마음이 씻기고 씻겨 거기 참한 한 별로 떠오르고 있습니다. 오색 물속에 피는 꽃잎들 쫙 펴 음악소리를 내줍니다. 

저녁이 잘 비칩니다. 두 다리를 비틀리게 하는 그 음악 소리 자세히 들여다보면 딱딱하고 굳은 혀와 마른 등걸처럼 갈라진 세월 속에

솟구치는 무늬, 바로 내 버려진 어둔 날들의 황홀한 고동 소리입니다. 그러나 나는 물방울 속 깊이 감춘 그 시절 내 이름을 결코 찾지 않으

렵니다. 부르지 않으렵니다. 창턱에 턱을 괸 수염이 꺼칠한 외로운 청년 하나, 먼 곳 집의 눈꺼풀인 커튼이 어른거리는 저녁, 모두 빛과 물의

씨앗들로 등싯 부풀어갑니다.



- 『나는 이제 소멸에 대해서 이야기 하련다』(문학과지성사 1994)




가슴의 환한 고동 외에는



박형준



가슴의 환한 고동 외에는 들려줄 게 없는

봄 저녁

나는 바람 냄새 나는 머리칼

거리를 질주하는 짐승

짐승 속에 살아 있는 영혼

그늘 속에서 피우는

회양목의 작은 노란 꽃망울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눈꺼풀에 올려 논 지구가 물방울 속에서

내 발밑으로 꺼져가는데

하루만 지나도 눈물 냄새는 얼마나 지독한지

우리는 무사했고

꿈속에서도 무사한 거리

질주하는 

내 발밑으로 초록의 은밀한 추억들이

자꾸 껴져가는데



- 시집 『생각날 때마다 울었다』(문학과지성사 2011)







'!시' 카테고리의 다른 글

어떤 나이에 대한 걱정 /이병률  (0) 2020.11.05
봄밤의 낮잠 / 김중일  (0) 2018.10.18
떠나는 꽃 / 김중일  (0) 2018.09.17
사랑스러운 피오르드 / 정지우  (0) 2018.08.11
이것은 희망의 노래 / 이원  (0) 2018.08.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