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
임승유
언덕을 오르고 있었다. 내가 언덕을 오르고 있어서 언
덕은 내려갈 수 없었다. 고개를 숙일 수 없었다. 몰래 웃
을 수도 없었다. 어디 가서 몰래 웃고 오기라도 한 것처
럼 언덕을 오르면
언덕은 먼저 가서 언덕이 되어 있었다. 기다리고 있었
다. 기다리기 싫어서 먼저 안 간 어느 날
언덕이 사라지기라도 한 것처럼 눈앞이 캄캄한 적도
있지만 언덕을 보면서 언덕을 오르면
언덕은 어디 안 가고 거기 있었다. 한번 언덕이 되면
언덕은 멈출 수 없다. 가다가 멈춘 언덕이라면 언덕은 다
온 것이라고. 잠깐 딴 생각을 하다가 언덕을 잊어버린 언
덕처럼 앉아 있으면
네가 지나갔다.
- 《나는 겨울로 왔고 너는 여름에 있었다》 ( 문학과지성사, 2020)
*
창문으로 항상 언덕이 보이는 이곳,
하루 대부분을 언덕을 보면서
사라진 언덕에 대해
아직 있는 언덕에 대해
그리고 그 언덕을 매일같이 같은 자리에서 보는 지금에 대해 생각을 한다
언덕길이 아름답다는 것을 이곳에 오고 알았다.
언덕이 그리워지기 시작하고부터
매일 아침 이곳으로 나올 힘이 생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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