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

시간들 / 안현미

kiku929 2021. 11. 12. 12:25

 

 

 


 시간들




 안현미



 침묵에 대하여 묻는 아이에게 가장 아름다운 대답은 침묵이다
 시간에 대하여도 그렇다

 태백산으로 말라죽은 나무들을 보러 갔던 여름이 있었지요

 그때 앞서 걷던 당신의 뒷모습을 보면서 당신만큼 나이가 들면 나는 당신 같은 사람이 되고 싶다 하였습니다


 이제 내가 그 나이만큼 되어 시간은 내게 당신 같은 사람이 되었냐고 묻고 있습니다 나는 대답을 할 수 없어 말라죽은 나무 옆에서 말라죽어가는 나무를 쳐다보기만 합니다

 그러는 사이 바람은 안개를 부려놓았고 열일곱 걸음을 걸어가도 당신은 보이지 않습니다 당신의 시간을 따라갔으나 나의 시간은 그곳에 당도하지 못하였습니다

 당신은, 당신은 수수께끼 당신에 대하여 묻는 내게 가장 아름다운 대답인 당신을 침묵과 함께 놓아두고 죽은 시간

 열일곱 걸음을 더 걸어와 다시 말라죽은 나무들을 보러 태백에 왔습니다 한때 간곡하게 나이기를 바랐던 사랑은 인간의 일이었지만 그 사랑이 죽어서도 나무인 것은 시간들의 일이었습니다



- 안현미시집 《이별의 재구성》 (창비, 2009)

 

 

*

 

안현미 시인에게 열일곱이란 숫자는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슬픔의 시간들이 비로소 시가 될 수 있는 시간이 아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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