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개사용법 안현미 안개 핀 호수를 건너 태백 이전으로 날아가는 시간들, 날아가 아픈 이마 위에 놓여질 착한 물수건 같은 시간들, 그 이마 위에서 안개처럼 피어오를 미열들, 그 미열들을 끌어안고 안개꽃이 되고 있는 저 여자 제 꼬리를 문 물고기 같은 여자 한때 나였던 저 여자 활엽수 같은 웃음소리를 지닌 저 여자 '안개라는 건 누군가가 혼자서 독점할 수 있는 게 아닌 모양이에요' 십자말풀이처럼 안개를 사용하던 한때 나였던 저 여자 안개를 끓여 모유처럼 배부르게 먹이던 여자 그 안개에선 극지까지 다녀온 바람의 냄새가 나고 말라죽은 나무의 이야기가 우러났다 그 안개를 '사랑'이라고 사용한 건 인간의 일이었지만 그 안개가 열일곱 묶음의 안개꽃이 된 건 시간만이 할 수 있는 일이었다 ―안현미 시집 『이별의 재구성』 (창비, 2009) 중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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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개라는 것은 어떤 실체의 존재만 어렴풋하게 있을 뿐 그 모습을 다 보여주지 않는다.
심증만 있는 그 속에서 어떤 이는 안개에 가려진 채로 자신에게 주어진 부당한 일을 수행하며 묵묵히 살아내는 현실이 있을 것이다.
보편적 가치가 있는 이름들, 사랑이라든가 정의라든가, 하는 그런 미명하에서 누군가에게 고통을 감내하게 하는 일 역시 폭력 내지 가학이라고 할 수 있겠지만 시간은 그런 안개 속의 시간조차 꽃다발로 승화시키도 한다.
어쩌면 시간의 일이라기 보다는 시인이었기에 가능했을지도 모를 테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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