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

명자꽃/ 안도현 , 도로시를 위하여/ 기형도

kiku929 2010. 1. 15. 17:48

 

             

 

 

 

                            명자꽃

 

 

                             안도현

 

 

그해 봄 우리 집 마당가에 핀 명자꽃은 별스럽게도 붉었습니다.

옆집에 살던 명자 누나 때문이라고 나는 생각하였습니다

나는 누나의 아랫입술이 다른 여자애들보다 도톰한 것을 생각하고는

혼자 뒷방 담요 위에서 명자나무 이파리처럼 파랗게 뒤척이며

명자꽃을 생각하고 또 문득

누나에게도 낯설었을 初經이며

누나의 속옷이 받아낸 붉디붉은 꽃잎까지 속속들이 생각하였습니다

그러다가 꽃잎에 입술을 대보았고 나는 소스라치게 놀랐습니다

내 짝사랑의 어리석은 입술이 칼날처럼 서럽고 차가운 줄을 처음 알게 된 그해는

4월도 반이나 넘긴 중순에 눈이 내린 까닭이었습니다

하늘 속의 눈송이가 내려와서 혀를 날름거리며 달아나는 일이 애당초

남의 일 같지 않았습니다

명자 누나의 아버지는 일찍 늙은 명자나무처럼

등짝이 어둡고 먹먹했는데 어쩌다 그 뒷모습만 봐도 벌 받을 것 같아

나는 스스로 먼저 병을 얻었습니다

나의 樂은 자리에 누워 이마로 찬 수건을 받는 일이었습니다

어린 나를 관통해서 아프게 한 명자꽃,

그 꽃을 산당화라고 부르기도 한다는 것을 알게 될 무렵

홀연 우리 옆집 명자 누나는 혼자 서울로 떠났습니다

떨어진 꽃잎이 쌓인 명자나무 밑동은 추했고,

봄은 느긋한 봄이었기에 지루하였습니다

나는 왜 식물도감을 뒤적여야 하는가,

명자나무는 왜 다닥다닥 紅燈을 달았다가 일없이 발등에 떨어뜨리는가,

내 불평은 꽃잎 지는 소리만큼이나 소소한 것이었지마는

명자 누나의 소식은 첫 월급으로 자기 엄마한테

빨간 내복 한 벌 사서 보냈다는 풍문이 전부였습니다

해마다 내가 개근상을 받듯 명자꽃이 피어도 누나는 돌아오지 않았고,

내 눈에는 전에 없던 핏줄이 창궐하였습니다

명자 누나네 집의 내 키만 한 창문 틈으로 붉은 울음소리가

새어나오던 저녁이 있었습니다

그 울음소리는 自盡할 듯 뜨겁게 쏟아지다가 잦아들고

그러다가는 또 바람벽치는 소리를 섞으며 밤늦도록 이어졌습니다

그 이튿날, 누나가 집에 다녀갔다고,

애비 없는 갓난애를 업고 왔었다고,

수런거리는 소리가 명자나무 가시에 뾰족하게 걸린 것을

나는 보아야 했습니다

잎이 나기 전에 꽃 몽우리를 먼저 뱉는 꽃,

그날은 눈이 퉁퉁 붓고 머리가 헝클어진 명자꽃이 그해의 첫 꽃을 피우던 날이었습니다.

 

 

 

                 

  도로시를 위하여
-幼年에게 쓴 편지 1-

 

 

                  기형도


1
도로시. 그리운 이름. 그립기에 먼 이름. 도로시.
나는 아직도 너를 기억한다. 그 얕은 언덕과 어두운 헛간, 비
가 내리던 방죽에서 우리가 함께 뛰어놀던 그리운 幼年들. 네
빠른 발과 억센 손은 같은 또래의 사내아이들을 제치고 언제나
너를 골목대장으로 만들어주었지. 우리는 아무도 여자애 밑에서
졸병노릇 하는 것을 불평하지 않았다. 언젠가 위험을 무릅쓰고
꺾어온 산나리꽃 덕분에 네가 내게 달아준 별 두 개의 계급장도
난 잊을 수 없다. 모두가 네 명령 밑에서는 즐겁고 가벼웠다.
네가 혼혈소녀였던 것도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았다. 어머니의
죽음 앞에서 한 방울의 눈물도 흘리지 않았던 용감한 도로시.
네가 고아원으로 떠나던 날의 그 이슬비를 아직도 나는 기억한
다. 네가 떠나자 우리는 얼마나 슬펐는지 모른다. 서로 번갈아
가며 대장 노릇도 해봤지만 아무런 흥미도 없었다. 도로시. 그
러나 우리가 어떻게 다시 재밌는 전쟁놀이를 시작했는지 알고
있니? 우리는 마치 네가 우리와 함께 놀고 있는 것처럼 행동했
다. 공터에서 술래잡기를 하고 철길 위를 뛰어다녔다. 네가 명
령을 내렸다. 도로시. 우리는 서로의 눈빛만 보아도 너의 명령
을 알아차렸다. 너는 어디에도 없었지만 비어 있는 대장의 자리
에서 늘 웃고 있었다. 언제이던가 나는 네가 늘 앉아 있던 자리
에 남몰래 찐빵을 갖다 놓은 적도 있었단다. 그렇게 우리는 네
가 없어도 너와 함께 즐겁게 놀 수 있었다. 그것은 모두 너에
대한 우리의 짧은 사랑 때문이었겠지.


2
도로시. 먼 이름. 멀기에 그리운 이름. 도로시.
너는 그 머나먼 대륙으로 떠나기 전에 딱 한 번 우리 마을에
들렀었다. 가엾은 도로시. 너는 오지 말았어야 했다. 우리는 벌
써 네가 필요없었다. 너는 주근깨투성이, 붉은 머리의 말라깽이
소녀에 불과했다. 왜 그날도 이슬비가 내렸는지 모른다. 그날
마을어귀에서 네가 보여준 그 표정, 도로시. 그것은 슬픔이었을
까, 아니면 대장으로서 보여줄 수 있었던 마지막 비웃음이었을
까. 그 후 우리는 재빨리 나이가 먹었고 쉽게 너를 잊었다. 도
로시. 그러나 절대로 우리가 버릴 수 없는 도로시. 그리운 이름.

 

 

 

안도현의 시 명자꽃을 읽었다.

명자꽃을 읽는데 기형도의 내가 좋아하는 '도로시를 위하여'라는 시가 생각나

함께 올려보았다.

 

소설에서는 이런 부류를 '성장소설'이라 칭하는데 시에서는 뭐라 부를까?

난 이런 류의 시나 소설을 읽으면 마음 한 켠에 아릿한 슬픔으로 가득차 온다.

내 마음속 어딘가의 죽은 듯 묻혀있던 것들이 푸르게 꿈틀거린다.

더이상 자랄 수 없는, 성장이 멈춘 생명이, 그러나 늘 함께 있는...

 

누구의 인생에서나 다시 올 수 없는 시절이 있다.

그건 그런 일이 다시 올 수 없다는 말이 아니라

그 시절 속의 내 마음, 내 열정, 내 감성이 다시는 올 수 없다는 말이다.

살아있으면서도 두번다시 돌아갈 수 없는 내가

잡힐듯 잡히지 않는 거기에 외따로 떨어져나가 있는 것이다.

 

가는줄도 모르게 내 손안에서 멀어져버린 아슴한 불빛들이

늘 슬픔으로 출렁이며 그곳에서 언제까지나 나를 부르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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