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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다린다는 것에 대하여 / 정일근

kiku929 2010. 1. 15. 17:51

 

                   

 

 

 

 

기다린다는 것에 대하여

 

 

                                   정일근

 

 

먼 바다로 나가 하루 종일

고래를 기다려본 사람은 안다

사람의 사랑이 한 마리 고래라는 것을

망망대해에서 검은 일 획 그으며

반짝 나타났다 빠르게 사라지는 고래는

첫사랑처럼 환호하며 찾아왔다

이뤄지지 못할 사랑처럼 아프게 사라진다

생의 엔진을 모두 끄고

흔들리는 파도 따라 함께 흔들리며

뜨거운 햇살 뜨거운 바다 위에서

떠나간 고래를 다시 기다리는 일은

그 긴 골목길 마지막 외등

한 발자국 물러난 캄캄한 어둠 속에 서서

너를 기다렸던 일

그때 나는 얼마나 너를 열망했던가

온몸이 귀가 되어 너의 구둣발 소리 기다렸듯

팽팽한 수평선 걸어 내게로 돌아올

그 소리 다시 기다리는 일인지 모른다

오늘도 고래는 돌아오지 않았다

바다에서부터 푸른 어둠이 내리고

떠나온 점등인의 별로 돌아가며

이제 떠나간 것은 기다리지 않기로 한다

지금 고래가 배의 꼬리를 따라올지라도

네가 울며 내 이름 부르며 따라올지라도

다시는 뒤돌아보지 않겠다

사람의 서러운 사랑 바다로 가

한 마리 고래가 되었기에

고래는 기다리는 사람의 사랑 아니라

놓아주어야 하는 바다의 사랑이기에

 

 

 

 

기다리는 건 이유가 없습니다.

그냥 기다려지는 것이지요.

하릴없이 한 곳을 향해 나의 모든 감각을 열어 놓은 채....

 

하지만 이미 바다로 떠나 고래가 되어버린 사랑을 기다리는 건

그조차 그에겐 속박인지도 모릅니다.

떠난 것은 자유롭게 멀리 멀리 헤엄쳐 갈 수 있도록

기다림마저 한 올의 무게도 되지 않기를 기도해야 합니다.

 

사랑엔 잡아주고 기다려줘야 하는 사랑이 있지만

놓아주고 외면해줘야 하는 사랑도 있다는 거...

사랑의 속성에 반하는 사랑은 춥고 아프고 서럽지만

그 사랑은 크고 깊다는 거...

홀로 자가발전하며 등불 밝혀 걸어가야 할 사랑도 있다는 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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