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

사선의 빛 / 허연

kiku929 2022. 2. 16. 11:17

 

 

사선의 빛

 

 

 

허연

 

 

 

끊을 건 이제 연락밖에 없다.

 

비관 속에서 오히려 더 빛났던

문틈으로 삐져 들어왔던

그 사선의 빛처럼

사라져가는 것을 비추는 온정을

나는 

찬양한 적이 있었다.

 

하지만 이제

그 빛이 

너무나 차가운 살기였다는 걸 알겠다.

이미 늦어버린 것들에게

문틈으로 삐져 들어온 빛은 살기다.

 

갈 데까지 간 것들에게

한 줄기 빛은 조소다

소음 울리며 사라지는

 

놓쳐버린 막차의 뒤태를

바라보는 일만큼이나

허망한 조소다.

 

문득

이미 늦어버린 것들로 가득한

갈 데까지 간

그런 영화관에

가보고 싶었다.

 

 

- 시집 <<내가 원하는 천사>> (문학과지성사, 2012)

 

 

 

 

 

*

시인이 한때 찬양했던 빛, 그것은 더이상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상태에서

자신을 비춰주는 한 줄기 빛을 온정이라고 믿었던 그 빛.

 

그러나

늦어버렸다고 백기를 들어올린 순간에 비추는 빛은 오히려 살기라는 것을

느꼈다면 시인의 부정적인 시선으로 보아야 할까.

 

오늘 아침, 손님들의 대화를 옮겨보면 대충 이렇다.

 

  여자는 믿지 마라,

  여자들은 멋있고 잘난 남자는 배신하지 않지만

  그렇지 않은 남자는 그냥 쉽게 버린다...

 

그러나 그럴수도, 아닐수도 있는 일이지만 나는 왠지 슬픔을 느끼게 되었다.

그 말 속에는 그가 지금까지 살아온 삶이 들어있을 테니까.

그러니 아무도 그 말에 대해 그렇지만은 않다고 말해줄 수 없는 것이다.

 

그리고 다시 한마디가 들린다.

 

  '있잖아, 가난하면 건달이 되는 거야...'

 

어쩌면 저 손님은 한줄기 빛이란 심판의 호각이 끝난 패배자에게 보내는 재스쳐일 뿐이라고

생각할런지도 모르겠다.

 

세상의 빛이 따스하다고 해서, 환하다고 해서, 꼭 순수하지만은 않다고 내가 생각한다면 

조금 더 성숙해졌다고 말해야하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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