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운기를 보내며
박노해
11월의 저물녘에
낡아빠진 경운기 앞에 돗자리를 깔고
우리 동네 김씨가 절을 하고 계신다
밭에서 딴 사과 네 알 감 다섯 개
막걸리와 고추장아찌 한 그릇을 차려놓고
조상님께 무릎 끓듯 큰절을 하신다
나도 따라 절을 하고 막걸리를 마신다
23년을 고쳐 써 온 경운기 한 대
야가 그 긴 세월 열세 마지 논밭을 다 갈고
그 많은 짐을 싣고 나랑 같이 늙어왔네 그려
덕분에 자식들 학교 보내고 결혼시키고
고맙네 먼저 가소 고생 많이 하셨네
김씨는 경운기에 막걸리 한 잔을 따라준 뒤
폐차장을 향해서 붉은 노을 속으로 떠나간다
`
*
'다시 책은 도끼다'에서 소개된 시다.
사물과 감정을 나눈다는 것, 정확히 말하면 나누는 것이 아니고 일방적으로 주는 것이겠지만
정을 계속 주다보면 어느순간부터는 나눈다는 생각이 든다.
나에게는 그러한 물건이 두 개가 있는데 하나는 자동차이고, 하나는 커피머신이다.
자동차를 혼자 운전하고 있으면 마치 나의 곁에 마지막 남게 될 존재인 것만 같다.
내가 어떤 상황이든, 어떤 사람이든 상관없이, 설령 그곳이 세상 끝이라고 해도 무조건 내 편에서 함께 동행해주는 존재.
자동차에 있는 동안 나는 한없이 자유롭다.
그리고 기죽지도 않고 열등감도 없이 당당해진다.
커피머신은 하루중 나와 가장 오랜 시간을 함께 한다
그 곁에 앉아 손님을 기다릴 때에도 커피머신은 물의 온도를 유지하기 위해 늘 움직인다.
가끔씩 소리를 내며 스스로 세팅을 하면서 나와 함께 손님을 기다려준다.
커피머신으로 나는 돈을 번다.
일을 얼만큼 하는가는 나에 달려 있고 커피머신은 그저 묵묵히 일한다.
밤이 되고 마감준비를 하는 시간, 바스켓에 클리너를 넣고 청소를 할 때의 그 기분은 뭐랄까,
나와 함께 하루를 버텨준 전우라고 해야할까,
마른 행주로 몸체를 닦으면 마치 소중한 사람의 손을 닦아주는 기분이 든다.
갈수록 주변에 사람들은 사라지고 말이 없는 것들이 늘어만 간다.
고요한 세상을 나 스스로 만들어가는 것인지도 모른다.
고요한 세상에서 나 또한 고요한 사람이 되어 그것들과 함께 저물어가는 삶을 나는 택한 것일까,
아니면 택하게 된 것일까, 어찌됐든 난 말 없는 것들이 좋다.
그러면서 나 역시 말 없는 사물처럼 누군가에게 머물 수 있기를 바래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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