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

어항골목 / 안현미

kiku929 2022. 4. 21. 11:48

 

 고장난 가로등처럼 서 있는 사내를 지나 방금 도착한 여자의 어깨에선 사막을 건너온 바람의 냄새가 났고

이 도시의 가장 후미진 모퉁이에선 골목이 부레처럼 부불어올라 고장난 가로등처럼 서 있던 사내의 구두가

담기고 있다 첨범, 여자는 의족을 벗고 부풀어오른 골목으로 물소리를 내며 다이빙한다 꼬리지느러미를 활

발히 흔들며 언어 이전으로 헤엄쳐간다 주름잡는다 여자의 주름에선 언어 이전에 있는 어떤 어항에서 꺼낸

것 같은 언어가 버블버블 퐁퐁 투명한 골목을 유영한다 인간의 남자를 사랑하여 아낌없이 버렸던 모든 것들

이 버블버블 다시 태어난다 그사이 젖은 구두를 벗은 사내도 산소통을 부레처럼 달고 언어를 떠나온다 어항

골목 고장난 가로등엔 물고기 달이 커진다 퐁퐁 골목밖으로 여자의 의족이 폭죽처럼 떠오른다

 

―안현미 시집 『이별의 재구성』 (2009, 창비시선)

 

 

 

*

 

 

판타지 영화를 볼 때 우리는 장면장면을 논리적으로 해석하지 않는다.

그러나 현실성과 동떨어졌다고 해서 우리가 느끼는 감정과 동떨어지는 것은 아닐 것이고

또 아니어야만 할 것이다.

어떤 식으로 전달하는가, 그 수단으로서의 방법이 다를 뿐이지 결국 모든 예술은 지금 그 예술을

마주하고 있는 이의 감정을 자극하여 움직이게 하는 것이리라.

 

'고장난 가로등처럼 서있는 사내', '사막을 건너온 의족을 한 여자'를 따라 가보면

구두와 의족을 벗고 언어 이전의 세계로, 어쩔 수 없이 선택하며 버려야 했던

개별적 존재의 자기라고 할 수 있던 것들이 다시 태어나는 골목. 

지금 그 골목에는 고장난 가로등 대신 물고기 달이 떠오른다.

여자의 의족이 폭죽처럼 터진다는 시의 마지막에서 어떤가.

시원하고도 통쾌한, 우리도 함께 해방감이 느껴지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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