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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날은 간다 / 안도현

kiku929 2010. 1. 15. 17:53

                       

                                                                                                                      photo by 황금물고기

 

 

    봄날은 간다

 

 

                     안도현



늙은 도둑놈처럼 시커멓게 생긴
보리밭가에서 떠나지 않고 서 있는 살구나무에
꽃잎들이 늘어나고 있었다
자고 나면 살구나무 가지마다 다닥다닥
누가 꽃잎을 갖다 붙이는 것 같았다

그렇게 쓸데없는 일을 하는 그가 누구인지
꽃잎을 자꾸자꾸 이어붙여 어쩌겠다는 것인지
나는 매일 살구나무 가까이 다가 갔으나
꽃잎과 꽃잎 사이 아무도 모르게
봄날은 가고 있었다
나는 흐드득 지는 살구꽃을 손으로 받아들다가
또 입으로 받아먹다가 집으로 돌아가곤 하였는데

어느날 들판 한가운데
살구나무에다 돛을 만들어 달고 떠나려는
한척의 커다란 범선을 보았다
살구꽃 피우던 그가 거기 타고 있을 것 같았다
멀리까지 보리밭이 파도로 넘실거리고 있었다

어서 가서 저 배를 밀어주어야 하나
저 배 위에 나도 훌쩍 몸을 실어야 하나
살구꽃이 땅에 흰 보자기를 다 펼쳐놓을 때까지
나는 떠나가는 배를 바라보고 있었다

*<너에게 가려고 강을 만들었다>,창비,2004

 

 

 

 

 

언제부턴가 홀로 서있는 나무에 그가 꽃을 매달아 주더니,

내가 알아차려 그 꽃들에 마음 빼앗기는 새

어느날 그는 커다란 범선 하나 만들어 떠나려합니다.

 

매일처럼 바라보던 그 꽃잎 달고 가버리고나면

바라보던 그 눈길 어디다 두어야 할까요.

 

어제도 오늘도

푸른 보리밭 사이로 돛을 단 어선들이 넘실넘실 떠나갑니다.

잘 가거라, 잘 가라...

그 꽃잎들에게도, 그에게도

손 흔드는 사이 봄날은 또 그렇게 흘러갑니다.

 

푸른 보리들이 눈에 시리게 차오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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