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

시집 <<아침은 생각한다>> 중에서

kiku929 2022. 7. 14. 18:54

 

오월

 

 

문태준

 

 

상수리나무 새잎이 산의 실내(室內)에 가득했다

 

나무 꼭대기까지 올라간 오월가 소년과 바람이 있었다

 

왜가리가 무논에 흰 빛으로 사뿐히 내려앉았다

 

파밭에는 매운맛이 새살처럼 돋았다

 

 

 

유월

 

 

문태준

 

 

사슴의 귀가 앞뒤로 한번 움직이듯이

오동나무 잎사귀가 흔들렸다

 

내 눈 속에서

푸르고 넓적한 손바닥 같은

작은 언덕에 올라선 시간은

 

 

 

 

늦가을비

 

 

문태준

 

 

늦가을비가 종일 오락가락한다

 

잔걱정하듯 내리는 비

 

씨앗이 한톨씩 떨어지는 소리가 난다

 

 

 

새와 물결

 

 

문태준

 

 

새는 물결을 잘 아네

 

새는 물결 위에 앉네

 

물결을 노래하네

 

오늘은 세개의 물결을 노래하네

 

물결은 하얗게 흔들리네

 

 

 

설백 (雪白)

 

 

문태준

 

 

흰 종이에 

까만 글자로 시를 적어놓고

날마다 다시

머리를 숙여 내려다본다

 

햇살은 이 까만 글자들을

빛의 끌로 파 갈 것이니

 

내일에는

설백만이 남기를

 

어느 때라도

시는

잠시

푸설푸설 내리던 

눈 같았으면

 

 

 

겨울 엽서

 

문태준

 

 

오늘은 자작나무 흰 껍질에 내리는 은빛달빛

오늘은 물고기의 눈 같고 차가운 별

오늘은 산등성이를 덮은 하얀 적설(積雪)

그러나 눈빛을 사라지지 않아

너의 언더에는 풀씨 같은 눈을 살며시 뜨는 나

 

 

눈보라

 

 

문태준

 

 

들판에서 눈보라를 만나 눈보라를 보내네

시외버스 가듯 가는 눈보라

한편의 이야기 같은 눈보다

이 넓이여, 펼친 넓이여

누군가의 가슴속 같은 넓이여

헝클어진 사람이 가네

그보다 더 고독한 사람이 가네

그보다 더 기다리는 사람이 가네

눈사람이 가네

눈보라 뒤에 눈보라가 가네

 

 

아버지의 잠

 

 

문태준

 

 

아버지는 잠이 많아지네

시든 풀 같은 잠을 덮네

아버지는 일만가지의 일을 했지

그래서 많고 많아라, 아버지를 잠들게 하는 것은

누운 아버지는 늙은 오이 같네

아버지는 연고를 바르고 또 잠이 들었네

늙은 아버지는 목침 하나를 덩그러니 놓아두고

잠 속으로 아주 갈지도 몰라

아버지는 세상을 위해 일만가지의 일을 했지

그럼, 그렇고 말고!

아버지는 느티나무 그늘이 늙을 때까지 잠잘 만하지

 

 

낙화

 

문태준

 

 

꽃이라는 글자가 깨어져나간다

물 위로

시간 위로

바람에 흩어지면서

 

꽃이라는 글자가 내려앉는다

물 아래로

계절 아래로

비단잉어가 헤엄치는 큰 연못 속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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