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월
문태준
상수리나무 새잎이 산의 실내(室內)에 가득했다
나무 꼭대기까지 올라간 오월가 소년과 바람이 있었다
왜가리가 무논에 흰 빛으로 사뿐히 내려앉았다
파밭에는 매운맛이 새살처럼 돋았다
유월
문태준
사슴의 귀가 앞뒤로 한번 움직이듯이
오동나무 잎사귀가 흔들렸다
내 눈 속에서
푸르고 넓적한 손바닥 같은
작은 언덕에 올라선 시간은
늦가을비
문태준
늦가을비가 종일 오락가락한다
잔걱정하듯 내리는 비
씨앗이 한톨씩 떨어지는 소리가 난다
새와 물결
문태준
새는 물결을 잘 아네
새는 물결 위에 앉네
물결을 노래하네
오늘은 세개의 물결을 노래하네
물결은 하얗게 흔들리네
설백 (雪白)
문태준
흰 종이에
까만 글자로 시를 적어놓고
날마다 다시
머리를 숙여 내려다본다
햇살은 이 까만 글자들을
빛의 끌로 파 갈 것이니
내일에는
설백만이 남기를
어느 때라도
시는
잠시
푸설푸설 내리던
눈 같았으면
겨울 엽서
문태준
오늘은 자작나무 흰 껍질에 내리는 은빛달빛
오늘은 물고기의 눈 같고 차가운 별
오늘은 산등성이를 덮은 하얀 적설(積雪)
그러나 눈빛을 사라지지 않아
너의 언더에는 풀씨 같은 눈을 살며시 뜨는 나
눈보라
문태준
들판에서 눈보라를 만나 눈보라를 보내네
시외버스 가듯 가는 눈보라
한편의 이야기 같은 눈보다
이 넓이여, 펼친 넓이여
누군가의 가슴속 같은 넓이여
헝클어진 사람이 가네
그보다 더 고독한 사람이 가네
그보다 더 기다리는 사람이 가네
눈사람이 가네
눈보라 뒤에 눈보라가 가네
아버지의 잠
문태준
아버지는 잠이 많아지네
시든 풀 같은 잠을 덮네
아버지는 일만가지의 일을 했지
그래서 많고 많아라, 아버지를 잠들게 하는 것은
누운 아버지는 늙은 오이 같네
아버지는 연고를 바르고 또 잠이 들었네
늙은 아버지는 목침 하나를 덩그러니 놓아두고
잠 속으로 아주 갈지도 몰라
아버지는 세상을 위해 일만가지의 일을 했지
그럼, 그렇고 말고!
아버지는 느티나무 그늘이 늙을 때까지 잠잘 만하지
낙화
문태준
꽃이라는 글자가 깨어져나간다
물 위로
시간 위로
바람에 흩어지면서
꽃이라는 글자가 내려앉는다
물 아래로
계절 아래로
비단잉어가 헤엄치는 큰 연못 속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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