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산
유진목
원산으로 가는 열차에 올라
혼자서 잠이 들었다
한 사람은 지키지 않을 약속을 하고
한 사람은 약속을 따르는 것처럼
원산으로 가는 열차는 가득 차고
옆자리는 비어 있었다
어디로든 이동하는 동안에는 잠이 쏟아진다
창밖에는 눈이 쏟아지는 것처럼
깨어나면 낯선 이가 옆에 앉아 창밖을 내다보고 있다.
원산으로 가요
거기서 살아요
창문이 덜컹이는 방에 나란히 누워
한 사람이 천장을 가리키면
한 사람이 천장을 보는 것처럼
깨어나면 또 다른 이가 옆에 앉아 창에 기대어 졸고 있다
플랫폼에는 이불을 닮은 눈이 소복이 쌓여 있어
저기 저 열차는 바람에 흔들리는 창문 같지
이불은 차고
베개는 낮고
어느새 나타난 역무원이 호각을 불어
새들이 멀리 흩어지는 것처럼
나는 원산행 열차에 올라
잠이 들었다.
- 작가의 탄생, 민음사, 2020
*
원산은 북한 강원도 북부에 위치한 항구도시다.
그러니까 물리적으로는 쉽게 갈 수 없는 곳이다.
시인은 지금 원산으로 가는 기차를 탔다.
꿈결인지 생시인지 구별할 수 없는 기차에서
자고나면 다른 사람이 앉아 있고
자고나면 다른 사람이 앉아 있다.
잠이 들어야만 갈 수 있는 곳,
원산...
그런 곳이 어디 원산 뿐이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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