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오는 날 시를 읽고 있으면
이생진
시 읽는 건 아주 좋아
짧아서 좋아
그 즉시 맛이 나서 좋아
'나도 그런 생각하고 있었어"
하고 동조할 수 있어서 좋아
허망해도 좋고
쓸쓸하고 외롭고 춥고
배고파도
그 사람도 배고풀 거라는 생각이 나서 좋아
눈오는 날 시를 읽고 있으면
누가 찾아올 것 같아서 좋아
시는 가난해서 좋아
시 쓰는 사람은 마음이 따뜻해서 좋아
그 사람과 헤어진 뒤에도
시 속에 그 사람이 남아 있어서 좋아
시는 짧아서 좋아
배고파도 읽고 싶어서 좋아
시 속에서 만나자는 약속
시는 외로운 사람과의 약속 같아서 좋아
시를 읽어도 슬프고 외롭고
시를 읽어도 춥고 배고프고
그런데 시를 읽고 있으면
슬픔도 외로움도 다 숨어버려서 좋아
눈오는 날 시를 읽고 있으면
눈에 파묻힌 집에서 사는 것 같아서 좋아
시는 세월처럼 짧아서 좋아
살면서 꼭 한 번 해보고 싶은 일 중 하나가
눈이 아주 많이 와서 산 속에 오갈 데 없이 갇혀버리는 거...
혼자는 외로우니 마음에 맞는 사람 하나 있으면 좋겠지만 없어도 상관없어.
그렇게 어느 산 속 외딴 집에서 방 한 칸 빌려 무작정 살아봤으면...
가방에 넣어둔 시집 한 권 날마다 읽으며
주인네가 주는 숲 내음 풀풀 나는 마른 나물이랑 밥 먹고
아직도 우듬지에 걸려있을 빨간 홍시들 내 마음인냥 바라보면서
가끔씩 그리운 사람 얼굴도 떠올리며 살아봤으면...
눈 속에 갇혀 세월에 그 눈 다 사라질 때까지...
'!시' 카테고리의 다른 글
東西路 /최랑 (0) | 2010.01.09 |
---|---|
되돌릴 수 없는 것들 / 박정대 (0) | 2010.01.09 |
사람이 풍경으로 피어나 / 정현종 (0) | 2010.01.09 |
꽃이 졌다는 편지 / 장석남 (0) | 2010.01.09 |
새로 생긴 저녁 / 장석남 (0) | 2010.01.0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