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서랍

어느날의 일기

kiku929 2010. 1. 9. 13:15

 

아침 아이 학교 갈 준비물을 찾느라 서랍 여기저기를 뒤지다가

종이 한 장을 발견했다.

펴보니 예전 내가 쓴 일기였다.

날짜를 보니 엄마가 돌아가시기 일주일 전쯤이다.

아마 병원에서 엄마를 병간호하면서 새벽에 쓴 글 같다.

 

 

2000. 7.20. AM:4.55

 

조금 전 엄마가 깨어났다.

의식이 또렷하니 기분도 좋은신듯 하다.

엄마에게 어제 저녁 그이와 아이들이 다녀간 것을 기억하냐고 묻자

엄마의 얼굴에 웃음이 돌더니 "영일이가 개구쟁이가 되었어"라고 말씀 하신다.

엄마는 영일이 이름만 들어도 얼굴에 환한 미소를 머금으신다.

전번, 고통으로 일그러진 엄마에게 영일이 사진을 보여주며

"영일이야"라고 했더니 엄마는 미소를 짓다가 그 모습 그대로 잠이 드셨다.

엄마가 영일이를 무척이나 사랑한다는 것은 알았지만

정말 이렇게까지 '영일이를 사랑하셨나?' 싶을 만큼 영일이를 보고싶어하고

영일이의 생각만으로 행복해하신다.

난 영일이나 가영이, 가애를 볼때마다 나의 아이들이라는 마음보다는

엄마가 그토록이나 사랑했던 아이들이라는 느낌이 들지도 모르겠다.

엄마가 좋아했던 음식, 좋아했던 꽃, 엄마가 좋아했던 사람들..

이렇게 우리 아이들이 엄마가 좋아했던 것 중의 하나라고 생각하면 우리 아이들이

너무나 귀할 것만 같다.

잘 키워야지...

엄마가 사랑했던 아이들이니까 엄마를 생각해서라도

아껴주며 예쁘게, 그리고 어엿한 성인이 될 수 있도록 키워줘야지...

 

엄마는 잠이 드셨다. 편안해 보이는 모습이다.

사람이 생을 마감한다는 것이 이렇게도 힘들고 먼 길인지....

몸 속 어딘가에도 조금의 생명력이 남아있으면 안되는,

모든 생명력이 다 소멸될 때까지 기다려야만 가능한 죽음...

가녀린 엄마에겐 너무도 힘겨운 싸움같다.

엄마와 그동안 지내왔던 일들,, 아마도 서운함도 있었을 시간...

엄마에게 미안하고 후회스런 마음이 한동안 나를 괴롭히리라..

내가 엄마를 얼마나 사랑하는지,

엄마를 외롭게 한 일들이 얼마나 후회되고 가슴아픈지 엄마는 알까?

엄마가 지금처럼 의식이 있고 말이라도 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과

엄마가 힘들지 않게 빨리 이 시간들이 끝나버렸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번갈아 스쳐간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을 저 세상으로 보낸다는 것이 과연 나에게 어떤 무게일까?

아마도 나중에야 알겠지...

지금은 막연하게 슬픔이나 엄마가 없는 자리의 외로움 정도로 느껴지겠지만

아마도 그 빈자리가 훨씬 크다는 것을 살면서 나는 알게 될 것이다.

 

엄마! 내가 너무도 사랑했던 엄마...

나는 지금 그 사람을 떠나보내고 있는 중이다.

하루 하루 서서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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