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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물의 미덕-'행복의 건축' 중에서/ 알랭 드 보통

kiku929 2010. 2. 25. 21:33

 

건물의 미덕

 

-질서

 

건축의 질서는 지나치게 복잡해지는 감정들로부터 우리를 방어해주기 때문에 또 매력적이다.

우리는 우리가 마음을 기댈 수 있는 규칙성과 예측가능성을 보여주는 인공적 환경을 환영한다.

결국 우리는 놀라운 일이 계속되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 것이다.

 

구조가 질서 있게 표현된 곳에서 우리는 결국 우리를 삼킬 수 밖에 없는 예측 불가능성을 길들였다는

느낌을 받는다. 상징적으로 말하자면, 알 수 없기 때문에 곤혹스러울 수밖에 없는 미래를 휘어잡았

다는 느낌을 받는 것이다.

 

우리는 문학에서처럼 건축에서도 중요한 작품은 복잡하다고 믿는 경향이 있지만, 많은 매혹적인

건물들이 사실 놀랄 만큼 단순하다. 심지어 반복적인 면도 있다.

 

아름다움이 질서와 복잡성이라는 양 극단 사이에 있다는 오래된 격언이 진실임을 보여준다.

배후에 위험이 존재해야만 안전이 얼마나 귀한지 알 수 있듯이, 혼란과 질서 사이에서

아슬아슬하게 줄타기를 하는 건물에서만 우리는 질서를 세우는 우리의 능력이 얼마나 고마운지 알 수 있다.

 

 

-균형

 

우리는 질서와 복잡성의 병치에서 생기는 즐거움 밑에서 이와 관련된 건 축학적 미덕인 균형을 확인할 수 있다.

낡은 것과 새로운 것, 자연스러운 것과 인공적인 것, 사치스러운 것과 수수한 것, 남성적인 것과 여성적인 것을

포함한 여러 대립들을 건축가들이 능숙하게 중재할 때마다 아름다움은 피어나는 것 같다.

 

 

-우아

 

우리가 건축에서 중시하는, 그리고 '아름답다' 라는 말을 붙이는 균형은 심리적 수준에서는 정신 건강이나

행복이라고 묘사할 수 있는 상태를 가리킨다는 결론이 나온다.

 

마야르 다리에는 자신의 성취를 수월하게 이룬 것처럼 보이게 하는 미덕이 덧붙여졌다. 사실은

수월하지 않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그것에 놀라게 되고 더욱 더 감탁하게 된다.

 

우아란 건축물이 힘만 쓰는 것이 아니라 세련되고 경제적인 모습으로 저항의 행동을 할 때

-지탱하거나, 가로지르거나, 보호할 때-드러나는 특질이다. 자신이 넘어선 난관을 강조하지 않는

겸손함을 보여줄 때 드러나는 것이다.

 

우리는 매우 복잡해졌을 수도 있는 것이 아주 단순하게 표현되었을 때 감탄한다. 거기에 엄청난

노력이 들어갔음을 직관적으로 느끼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것을 보면서 인간 본성에는 우리가 단순히 생존하는 것을 넘어 서서 번영을 누릴 수 있게 해주는

특면들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확인한다. 이런 우아한 손길을 보면 우리가 실용적으로 사리를 분별하기만 하면서

사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

 

-일치

 

일본 시골에서 네덜란드의 한 구석에 있는 자신을 발견하고 불편함을 느낄 때 우리는 건물에 또 다른 요구를

하게 되는 것인지도 모른다. 건물이 자신의 각 부분과 조화를 이룰 뿐 아니라, 그 배경과도 조화를 유지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 자신이 있는 장소와 시대의 중요한 가치와 특징에 관해서 우리에게 이야기를 해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일본 '하우스 텐보스 네덜란드 마을을 비교하면서)

 

건물이 그 배경을 부정할 때 곤혹스럽듯이, 그 반대되는 경향의 증거가 발견될 때는 유쾌하다.

건물들이 그 지역의 건축적 특질을 뚜렷하게 보여줄 때가 그렇다. 그것이 새로운 나라에 발을 디딜 때

눈에 띄곤 하는 사소한 특색이어도 좋다.

 

문제가 되는 것은 민족적 스타일이 무엇이냐가 아니라 무엇을 민족적 스타일로 삼을 것이냐이다.

그 지역의 정신 가운데 어느 측면을 부각시킬 것인지 선택하는 것은 건축가들의 특권이다.

 

제대로 맥락을 잡은 건물이라면 그 시대와 장소의 가장 바람직한 가치와 가장 높은 야망 가운데 일부를 채현한다고

규정할 수 있다. 실행에 옮길 수 있는 이상을 담은 저장소 역할을 하는 건물인 셈이다.

 

 

내가 만난 일본의 위대한 현대 주택들은 그 가구가 단출한 경우

가 많았다. 공허와 내핍을 지향하는 일본 미학의 오랜 인력이 작용했기

때문일 것이다. 중세의 조신 가모노 초메이는 <방장기方丈記>에서 불필요

한 소유에서 벗어나 자신의 영혼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는 사람들에게

약속된 해방을 묘사했다. 그 결과 소박한 목조 오두막이 일본인의 상상

에서 특권적 자리를 차지했다. 모모야마(1573~1614년)와 에도 시대의 위

대한 영주들은 몇 달에 한 번씩 저택과 성을 떠나 오두막에서 시간을 보

냈다. 영적인 깨달음은 꾸밈없는 삶을 통해서만 얻을 수 있다는 선의 통

찰을 따른 것이다.

 이런 현대적이면서도 훌륭한 거주지 가운데 다른 예들 역시 일본인이

전통적으로 좋아했던 물질적 불완전성을 충실히 따르고 있었다. 도쿄에

서 자동차로 몇시간 거리에 있는 어떤 주말 별장의 묵직한 바깥벽은 녹

이 슬어가는 거친 쇠로 이루어졌으며, 이끼와 물 떄문에 얼룩덜룩하기까

지 했다. 그러나 이런 얼룩을 닦으려고 하지도 않았고, 배수관을 이용해

이 재료를 보호하려고 하지도 않았다. 외려 자연이 인간의 작품을 공격

하는 것을 보며 즐거워하는 것 같았다. 이 보다 오래된 찻집의 건축가들

은 거의 같은 이유로 나무에 광택제를 바르지 않고, 이로 인해 생긴 오래

된 느낌과 세월의 흔적을 귀중하게 여겼다. 그들은 이것을 만물 무상의

지혜로운 상징으로 보았다. 다니자키 준이치로는 <그림자 찬양>(1933년)

에서 자신과 동포들이 왜 흠을 그렇게 아름답게 여기는지 설명하려 했

다. "우리는 빛나고 반짝거리는 것들에서는 사실 편안함을 느끼기 힘들

다. 서양인들은 은과 철과 니켈 식기를 사용하고, 그것들이 반짝거릴 정

도로 광택을 낸다. 하지만 우리는 그런 관행에 반대한다. 우리도 가끔 찻

주전자, 병, 술잔을 은으로 만들기도 하지만, 광택을 내지는 않는다. 오

히려 광택이 사라질 떄부터, 어둡고 뿌연 녹이 슬기 시작할 때부터 비로

소 그것을 애용하기 시작한다." 불교의 글들은 나무나 돌의 불완전한 면

을 참지 못하는 태도를 존재에 내재하는 실망스러운 본성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태도와 연결시켰다. 그러나 우리 자신의 실망스러운 면이나 쇠퇴

와는 달리 건축 재료에서 드러나는 그런 결함은 매우 우아해 보인다. 나

무와 돌, 그리고 현대의 콘크리트와 나무는 천천히 위엄 있게 나이를 먹

어가기 때문이다. 그들은 유리처럼 히스테리를 부리며 부서지지도 않고,

종이처럼 찢어지지도 않는다. 다만 우울하게, 고귀하게 변색될 뿐이다.

이 주말 주택의 녹이 슬고 얼룩이 진 벽은 쇠퇴와 도덕성에 관한 생각을

담을 수 있는 매우 예술적인 그릇이 되었다.  -p 250-

 

 

-자기인식

 

우리의 만족감은 섬세하고 예기치 못한 실로 짜여 있기 대문에 설계는 실패하곤 한다.

의자가 우리를 편안하게 지탱해주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거기에 추가로

우리 등이 가려져 있다는 느낌도 주어야 한다.

어쩌면 우리는 어떤 수준에서는 육식동물에 대한 우리 조상의 공푸를 여전히 털어버리지 못한 것인지도 모른다.

현관문에 가가갈 때는 앞에 작은 문지방, 난간, 차양, 한 줄고 늘어선 꽃이나 돌이 있으면 기분이 좋다.

이런 것들 덕분에 공적인 공간으로부터 사적인 공간으로 옮겨간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고 낯선 집을 드나들 때의

불안감도 달랠 수 있기 때문이다.

 

나쁜 건축이란 결국 설계만큼이나 심리 파악의 실패이기도 하다.

이와는 반대로 우리가 아름답다고 부르는 곳들은 겸손과 끈기를 갖춘 드문 건축가들의 작품이다.

그들은 겸손한 마음으로 자신에게 자신의 욕망에 관해 캐묻는다. 기쁨을 이해하면 그것이 사라지기 전에

끈기를 갖고 논리적 설계도로 바꾸어 놓는다. 이런 겸손과 끈기가 결합되어 그들은 우리 스스로도 의식하지

못했던 요구까지 충족시키는 환경을 창조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