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 잠에서 깨었다.
어제부터 따끔거리기 시작한 목이 잠결에도 계속 아파 깊이 잠들 수가 없었나보다.
거실 한 쪽에 놓여있던 사탕 하나 물어보니 상큼한 과일맛이 기분을 밝게 해준다.
밖은 아직 어둠,
가로등 불빛 두 개가 보인다.
옆에 있는 책을 들춰본다.
'은밀한 생'중에서 몇번을 읽었던 구절이 눈에 들어온다.
"내가 당신을 잃었다는 사실 자체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훨씬 더, 당신을 잃은 방식 때문에
고통을 느낍니다."
사랑이란 것이 그런 것 같다. 아니 굳이 사랑이 아닌 관계에서도 그렇다.
하지만 사랑이라 말하는 것은 사랑하지 않으면 우린 의식할 필요가 없으며,
고통 또한 느끼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사랑은 고통과 같은 말인지도 모른다.
심지어 가장 행복한 순간에도 고통은 함께 머문다.
잃는 것에 대해, 사라지는 것에 대해, 변하는 것에 대해...
사랑하지 않는다면 그런 불안이 있을리가 없지 않은가.
돌아보면 적지 않은 인연들이 스치고 지나갔다.
결별은 언제나 슬펐지만 모든 이별이 상처를 주거나 불행을 안겨주지는 않았다
그리고 고통이 없었던 결별은 추억에도 고통이 없다는 것을 알게 된다.
과거의 시간들이 그려낸 전시회를 둘러보는 기분으로 그 추억들을 회상할 수 있다.
그러나 결별하는 방식으로 인해 고통을 느낀 시간들은 추억도 언제까지나 상처입은 채로 남아있다.
헤어지면서 아프게 하면 안되는 이유이다.
그때의 상처는 치유할 수 있는 시간이 두 사람에게 조금도 남아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것으로 시간의 문은 굳게 닫히고 큐브에 갇힌 영원한 시간으로 정지되어버린다.
어쩌면 어떤 시간을 오래도록 기억한다는 것은 상처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상처는 흉터를 남기니까. 그리고 흉터는 언제나 기억을 불러오니까.
예전에는 사랑을 소설이나 영화처럼 바라보았다. -그때는 몰랐지만 지금 생각하면 그렇다.-
그래서 사랑이 완성되기 보다는 가장 아름다운 순간에 미완으로 끝나는 것이 좋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러면서 한 남자, 한 여자의 평생토록 바라보는 지고지순한 사랑에 감동을 받기도 하였다.
하지만 지금은 그보다는 지금 이 시간에 구체적으로 느끼는 사랑의 감정들이 소중하다고 생각한다.
함께 공유하고, 함께 느끼고, 함께 나누는...
비록 가슴에 각인될 만한 추억이 남지 않더라도 더불어 아름답게 머물다
아름답게 흘러가는 것이 더 좋은 거라고...
누군가 나를 뒤에서 평생토록 사랑해준다 한들 내가 모른다면 그것이 나와 무슨 상관이 있을까,
나의 기쁨이나 행복과 무슨 관계가 있을까...(관객이나 독자라면 알겠지만)
책을 봐도, 영화를 봐도, 시를 읽어도 거의 사랑에 관한 주제이다.
그건 그만큼 사랑이 흔치 않다는 역설의 뜻이기도 하겠다.
흔하게 화자되는 것일수록 가장 어려운 일, 가장 갈망하는 대상이 되는 것일 테니까...
그만큼 존재의 확률도 적다.
사랑은 삶의 달콤한 유혹인지도 모른다. 인생의 미끼같은...
우리는 그 미끼를 물기 위해 모래 위를 걷는 것 같은 이 삶을 살아내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비록 이유도 없이 새들이 페루에 와서 죽게 되는 것처럼 생의 마지막 순간이 오게 되더라도
우리는 그때까지는 한가닥 희망을 놓지 않을 것이다.
연인에게, 아이들에게, 남편에게, 자신에게...
사랑을 믿지 않는다 하면서도 매번 사랑을 기대하게 되고, 다시 실망하며 또다시 희망을 가져보면서.
사랑이 있어 다행이다.
적어도 살아야 할 명분이 있으니...
2010.3.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