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랍장은 좋겠다
윤희상
감초는 감초로 담고,
양귀비는 양귀비로 담고,
흐린 뒤의 노을은 흐린 뒤의 노을로 담았다
속옷은 속옷으로 담고,
아픔 상처는 아픈 상처로 담고,
보고 싶은 얼굴은 보고 싶은 얼굴로 담았다
눈물은 눈물로 담고,
헤어진 날의 우울은 헤어진 날의 우울로 담았다
기쁨이 슬픔을 간섭하지 않고,
여자가 남자를 간섭하지 않고,
미움이 그리움을 간섭하지 않았다
어쩌다가 그것대로 꺼내 보기까지 했다
서러운 것과 애잔한 것과 정든 것과
안타까운 것들이 뒤섞이고 뒤섞인 나의 마음은
아침에 온 새가 물고 가지 않았다
*시집 <소를 웃긴 꽃>,문학동네,2007
모처럼 비가 내리는 휴일이다.
아침부터 난 창가와 베란다를 서성이고만 있을 뿐 집안일엔 도통 손이 가지 않는다.
얼마만에 내리는 비인지...
오늘같은 날은 내 마음의 서랍들이 모두 스르르 열리는 기분이다.
우울한 것과 애잔한 것과 쓸쓸한 것과 넘치는 것과
슬펐던 것과 기뻤던 것, 그 모든 시간들이 알맞게 뒤섞인다.
이런 마음이 싫지 않다.
비오는 이런 날엔,
일부러라도 서랍속에 잠들어 있던 것들을 흔들어 깨우고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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