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은 언제나 진다
김종미
나를 항복시키려고 꽃이 핀다
어떠한 권력도
어떠한 폭력도 이와 같은 얼굴을 가질 수 없어
며느리밑씻개란 어처구니없는 이름의 꽃도
내 앞에 권총을 빼들었다 총알을 장전한
꽃 앞에 이끌려 나오지 않으려고
이중 삼중 문을 닫고 커튼까지 쳤으나
몽유에 든 듯
여기가 어딘지 깨어보면
꽃에 코를 쳐박고 있거나
눈동자에 그득 꽃잎을 쑤셔 박고 있다 나는
이미 수형에 든 것이다
네가 꽃인 것이 죄인지
내가 사람인 것이 죄인지
쏟아진 물처럼 살아있는 것은 다 스며야한다
이 지독한 음해의 향기에
수갑 채여
꽃비 촘촘한 창살 속
애벌레처럼 둥글게 몸을 말아 바치며
나는 너를 이길 수 없어 완전히
내가 졌다고 생각할 때
꽃이 졌다
나를 항복시켰으면 너는 잘 나가야지
꽃은 언제나 져서 나를 억울하게 한다
*제1회 시산맥 작품상 수상작
꽃에 항복하는 일,
아니 스스로 알아서 투항하는 일은 조금도 억울하지 않다.
이기려 해본 적은 더더구나 한 번도 없었다.
왜냐하면 승산없는 싸움이란 걸 이미 잘 아니까...
사랑도 그렇다.
언젠간 떠날줄 알면서도 매번 빠져버리는 것...
그래도 억울한 일은 아니다.
처음부터 승산없는 싸움이라는 걸 우린 알았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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