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두에 울다
나희덕
떨리는 손으로 풀죽은 김밥을
입에 쑤셔넣고 있는 동안에도
기차는 여름 들판을 내 눈에 밀어넣었다.
연두빛 벼들이 눈동자를 찔렀다.
들판은 왜 저리도 푸른가.
아니다. 푸르다는 말은 적당치 않다.
초록은 동색이라지만
연두는 내게 좀 다른 종족으로 여겨진다.
거기엔 아직 고개 숙이지 않은
출렁거림. 또는 수런거림 같은 게 남아 있다.
저 순연한 벼포기들.
그런데 내 안은 왜 이리 어두운가.
나를 빛바래게 하려고 쏟아지는 저 햇빛도
결국 어두어지면 빛바랠 거라고 중얼거리며
김밥을 네 개째 삼키는 순간
갑자기 울음이 터져나왔다. 그것이 마치
감정이 몸에 돌기 위한 최소조건이라도 되는 듯.
눈에 즙처럼 괴는 연두.
그래. 저 빛에 나도 두고 온 게 있지.
기차는 여름 들판 사이로 오후를 달린다.
이 시의 계절은 여름이지만 나는 해마다 오월이면 이 시가 생각나곤 한다. 세상 어디를 보아도 온통 연두빛으로 가득한 오월, 그 여린 빛깔이 왜 그토록 내 마음을 아뜩하게 만드는 것인지 알 것만 같다. 그건 그 빛에 묻어두고 온 흘러간 시간들, 그러나 영원히 끝나지 않을 그리움 같은 것... 비가 그친 창밖의 풍경은 연두빛으로 더욱 선명하고 그 여리고 고운 연두에 내 눈은 순간 윤슬처럼 반짝인다. 아직도 내가 연두에 울 수 있다는 것이 이토록 감사하고 행복한 일일줄이야...!
"아아, 강실아. 무지개같이 둥글고 이쁜 사람아.
네가 없다면... 네가 없다면...
나의 심정이 연두로 물들은들 어디에 쓰겠느냐.”
<혼불>1권 '심정이 연두로 물들은들' 중에서 / 최명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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