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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비 내리던 밤에...

kiku929 2012. 4. 21. 23:56

 

 

 

 

아침부터 창밖을 내다보니 비가 내린다.

올 봄 더디게도 피워낸 벚꽃들이 이제 겨우 절정이건만 제대로 머무는 시간도 없이 저 비에 사라지다니...

저녁 혼자서 우산을 쓰고 아파트 안 벚꽃이 피어있는 길을 걸었다.

한 바퀴, 두 바퀴, 세 바퀴...

그래도 만개한지 얼마 안된 꽃이라서일까?  나무줄기마다 화사하게 피어있는 꽃들이 비에 흠뻑 젖은 채로

큰 송이들을 이루며 매달려 있다.

가지끝을 잡고 꽃잎들을 손끝으로 만져본다.

난 손끝에 닿는 꽃잎들의 촉감이 너무나도 좋다.

이 세상 가장 아름다운 것을 내가 만지고 있다는 사실, 그 형용할 수 없는 차오르는 생명감...

바닥에 고인 물 웅덩이에는 꽃잎들이 하얗게 바람에 쏠려 떠다니고 꽃잎을 담고 지상으로 낙하하는 빗방울들은

우산위로 튕겨져 나간다.

그리고 나는 그 꿈속같은 길을 걷고 또 걷는다. 천당도 지옥도 이 생에 함께 있다면 그 시간은 분명 천국이었다.

지나는 길, 올 해부터 아파트 지하 상가의 야채가게 아줌마가 내다 팔고 있는 꽃화분이 보이길래 잠시 구경한다.

올 봄에 그 집에서는 후쿠시아랑 둘째딸 친구 엄마들에게 선물하기 위해 아마릴리스 구근을 산 적이 있다.

덕분에 몇년간 잠시 소원했던 야채가게 아줌마와도 말꼬를 다시 트게 되었고 그동안 그 앞을 지나다니면서 느껴야 했던

불편함도 사라지게 되었으니 올 봄 내가 한 일 중 가장 좋은 일이 아닌가 싶다.

확실히 꽃은 사람의 마음을 유하고 순하게 만들어주는 힘이 있나보다.

다른 손님과 한참 이야기를 나누고 있던 그 아줌마는 나를 알아보더니 웃으며 "나오셨어요? "한다.

난 "잠시 꽃이나 구경하려구요."하면서 이것저것 바라보고 있는데 한구석 비에 맞고 있는 분홍 수국이 눈에 들어온다.

누군가 좋아하는 꽃이 뭐냐고 묻는다면 나는 "수국이예요."라고 답할 만큼이나 좋아하는 꽃...

엄마가 좋아했던 꽃, 그래서 엄마 생각이 나는 꽃...

하지만 겨울 햇살은 부족하고 여름엔 햇살이 아예 들어오지 않는 우리집 베란다에서는 키울 엄두가 나지 않아

여즉 키우지 못했던 꽃...

그런데 오늘 비에 맞고 있는 그 수국은 차마 외면할 수가 없는 것이었다.

내 수중에는 돈 한 푼 없는데 마음은 온통 수국으로 가 있으니 스스로도 난감하다.

"돈도 안갖고 나왔는데... 저 수국은 얼마예요? "라고 묻자 아줌마는 "돈이야 다음에 주면 돼죠. 딱 하나 남았으니까 천 원 빼줄게요." 한다.

그렇게 난 한 손으로 우산을 받쳐들고 다른 한 손으로는 수국을 가슴에 안고서 집에 돌아왔다.

푸른 수국이었으면 더 좋았을 텐데 하는 생각이 잠시 스쳤지만 어쩐지 꽃에게 미안한 일 같아서 이내 아쉬움을 털어버렸다.

지금 우리 집에는 엄마 집을 정리하면서 가져온 빈 화분이 하나 있다.

엄마는 그 화분에 라일락을 심어놓았었는데 난 아직까지도 뭘 심어야 할지 몰라서 빈 화분채로 놓아 둔 것이다.

나는 그 화분을 거실로 들여와 오늘 산 수국을 심으면 좋을 것 같다고 생각하고 있는데 그 순간 TV 속 드라마 대사가 귀에 들어온다.

"기억하고 있으면 마음 속에서는 함께 살 수 있는 것이오. 기억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할 수가 없는 것이니..."

누군가를 기억한다는 일은 참 간절한 일이구나 싶었다.

한때는 내가 엄마를 기억하는 것이 버거울 때가 있었다. 너무 아파서 기억이 나지 않았으면 하고 바랄 때도 있었다.

그런데 이제는 내가 기억하고 있다는 이 사실이 너무나도 감사하다.

내가 언제나 기억하고 있기에 엄마는 내가 생각하고 행동하는 순간순간 수시로 왔다가 가곤 한다.

오늘밤도 내가  꽃비속을 걷고 수국을 발견하고 꽃을 가슴에 안고 집에 돌아오는 그 사이에도 엄마는 몇번씩이나 나를 다녀가셨다.

그리고 지금 와인 한 잔 옆에두고 글을 쓰고 있는 이 순간에도...

 

 

 

 

 

덧글...

그런데 오늘 술은 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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