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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패의 힘 / 나희덕 (애송시)

kiku929 2012. 6. 2. 14:57

 

 

 

                                                                                                                 땅은 무엇이든 담아낸다.

 

 

 

 

부패의 힘

 

 

나희덕

 

 

 

벌겋게 녹슬어 있는 철문을 보며
나는 안심한다
녹슬 수 있음에 대하여

 

냄비 속에서 금세 곰팡이가 피어오르는 음식에
나는 안심한다
썩을 수 있음에 대하여

 

썩을 수 있다는 것은
아직 덜 썩었다는 얘기도 된다
가장 지독한 부패는 썩지 않는 것

 

부패는
자기 한계에 대한 고백이다
일종의 무릎끓음이다

 

그러나 잠시도 녹슬지 못하고
제대로 썩지도 못한 채
안절부절,
방부제를 삼키는 나여
가장 안심이 안되는 나여


 

 

 

*시집  <그곳이 멀지 않다>, 민음사

 

 

 

 

 

 

김훈의 말이 생각난다.

언어의 힘이라는 것은 다른 사람에 의해 수정되고 무너지고 부정되는 허약한 것이기 때문이라고,

그것이 소통할 수 있는 힘이 된다고...

만약 언어가 다른 언어에 의해서 부서지지 않는 것이라면 그것은 언어가 아닌 무기가 되는 거라고...

 

난 대화가 통하는 사람들과의 만남을 좋아한다.

통한다는 것은 나의 말이 그 사람에게 흡수가 되고, 그 사람의 말이 나에게 흡수가 되는 것을 말한다.

그러지 않고 서로 탁구공처럼 튕겨나가는 말만을 주고 받는다면 이내 피곤해질 뿐더러 말할 의욕을 잃게 된다.

지금까지 내가 만났던 사람중에서도 그런 류의 몇몇을 본 적이 있다.

그 철통같은 단단함 속에서 난 숨이 막히는 줄 알았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본인은 아무렇지 않게 편해보인다는 것이다.

흔들림 없다는 것은 갈등이나 고민이 필요없는 자신에겐 평화로운 일인지도 모를일이다.

 

타인에게 영향을 미치는 지위에 있는 사람일수록 일방통행의 길만을 고집하게 된다면

그것은 무소불능의 무기를 휘두르는 일과 같다. (역사의 예를 들지 않더라도)

다른 무엇으로도 변화할 여지가 없는 단단한 것들은 부패하는 일보다 훨씬 무서운 존재들이다.

단단한 것, 고정된 것, 변할 줄 모르는 것, 틀에 박힌 것, 그리고 어느 한 시절속에 멈춰버린 것...

자신의 생각을 방부제로 온통 먹칠하며 살아가는 사람,

타인에게 상처를 주는 일은 모두 여기에서 비롯되는 것 같다.

 

함민복 시인은 그래서 '말랑말랑한 힘'에 대해 역설하지 않았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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