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과야 미안하다
정일근
사과 과수원을 하는 착한 친구가 있다. 사과꽃 속에서 사과가 나오고 사과 속에서 더운 밥이 나온다며, 나무야 고맙다 사과나무야 고맙다. 사과나무 그루 그루마다 꼬박꼬박 절하며 과수원을 돌던 그 친구를 본 적이 있다. 사과꽃이 새치름하게 눈뜨던 저녁이었다. 그날 나는 천 년에 한 번씩만 사람에게 핀다는 하늘의 사과꽃 향기를 맡았다.
눈 내리는 밤에 친구는 사과를 깎는다. 툭, 칼등으로 쳐서 사과를 혼절시킨 뒤 그 뒤에 친구는 사과를 깎는다. 붉은 사과에 차가운 칼날이 닿기 전에 영혼을 울리는 저 따뜻한 생명의 만트라. 사과야 미안하다 사과야 미안하다. 친구가 제 살과 같은 사과를 조심조심 깎는 정갈한 밤, 하늘에 사과꽃 같은 눈꽃이 피고 온 세상에 사과 향기 가득하다
칼등으로 쳐서 사과를 혼절시킨 뒤 사과를 깎는다는 농부의 착한 마음...
이 세상에 저런 마음이 아직도 있다는 게 감사하고 또 감사하다.
그리고 기도한다.
그의 사과나무에 사과꽃 새하얗게 피어나고,
주렁주렁 사과가 붉은 등처럼 환하게 걸려주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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