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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 아침 / 안도현

kiku929 2010. 1. 11. 13:58

 

 

 

 

  겨울 아침

 

 

                    안도현

 

 

눈 위에 콕콕 찍어 놓은 새 발자국

비틀거리지 않고 걸어간 새 발자국

한 글자도 자기 이름을 남겨두지 않은

새 발자국

 

없어졌다, 한 순간에

새는 간명하게 자신을 정리했다

 

내가 질질 끌고온 발자국을 보았다

엉킨 검은 호스 같았다

 

날아 오르지 못하고,

나는 두리번 거렸다

 

 

시집 - 너에게 가려고 강을 만들었다 (2004년 창비)

 

 

 

 

염낭 거미가 있다.

염낭 거미는 알을 낳을 준비가 되면 잎을 싸고 방을 만들어 그 안에서 나오지 않는다고 한다.

그렇게 새끼를 지키고 새끼를 부화하게 되면 어미는 살아있는 채로

자신의 새끼들에게 먹이가 되어준다.

가끔 그런 생각을 한다.

나도 염낭거미처럼 그렇게 깨끗하게 내 한 몸 누군가에게 온전히 바치고 죽어도 좋을 것 같다고.

내 몸으로 자식을 키우는 것은 염낭거미와 마찬가지겠지만

삶이 어떤 때는 남루하단 생각이 든다.

 

새의 발자국처럼, 한 순간에 자신을 정리하는 그 간명함...

그에 비해 나의 발자국은 질질 끌려오는 밧줄처럼 고되다.

어느 한 순간도 산뜻하게 나를 정리해본 적이 없으니,

살아온 나날이 내겐 연민이었다.

오늘도 나로인해 질척거린 하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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