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된 여행가방
김수영
스무 살이 될 무렵 나의 꿈은 주머니가 많이 달린 여행가방과 펠리컨 만년필을 갖는 것이었다. 만년필은 주머니 속에 넣어두고 낯선 곳에서 한 번씩 꺼내 엽서를 쓰는 것.
만년필은 잃어버렸고, 그것들을 사준 멋쟁이 이모부는 회갑을 넘기자 한 달 만에 돌아가셨다.
아이를 낳고 먼 섬에 있는 친구나, 소풍날 빈방에 홀로 남겨진 내 짝 홍도, 애인도 아니면서 삼년 동안 편지를 주고받은 남자, 머나먼 이국땅에서 생을 마감한 삼촌.......
추억이란 갈수록 가벼워지는 것. 잊고 있다가 문득 가슴 저려지는 것이다.
이따금 다락 구석에서 먼지만 풀썩이는 낡은 가방을 꺼낼 때마다 나를 태운 기차는 자그락거리며 침목을 밟고 간다. 그러나 이제 기억하지 못한다. 주워온 돌들은 어느 강에서 온 것인지, 곱게 말린 꽃들은 어느 들판에서 왔는지.
어느 외딴 간이역에서 빈자리를 남긴 채 내려버린 세월들. 저 길이 나를 잠시 내려놓은 것인지, 외길로 뻗어 있는 레일을 보며 곰곰 생각해본다. 나는 혼자이고 이제 어디로든 다시 돌아갈 수 없다는 것을.
*환상을 갖게 하는 물건, 두 가지
시인의 스무 살 무렵 갖고 싶었던 두 가지가 바로 여행가방과 펠리컨 만년필이라니...
이 대목에서 멈칫한다.
내 마음속에도 이 두 가지는 지금도 남아있기 때문이다.
여행가방은 아마도 나만의 동굴같은 방에 대한 환상때문일 것이다.
가방을 들고 여행을 떠나는 일이야말로 假房이란 말에 가장 적합한 행위가 아닐런지.
사람은 누구에게나 그런 假房이 필요할 때가 있다.
또 하나, 만년필은 사실 내가 갖고 싶은 것이라기 보다는 누군가에게 가장 선물하고 싶은 물건이다,
그것은 만년필을 사랑하는 사람, 지금 같은 세상에도 만년필로 글을 쓰는 사람에 대한 환상이 있기 때문이다.
만년필은 쓰는 사람에 따라 길들여지는 물건이다. 그 사람의 습관에 의해 촉이 변하고 글체가 달라진다.
촉이 갈라져도 그대로가 멋이 되고, 사랑하는 누군가에게 물려주는 물건으로도 손색이 없는 것이다.
사실 내 마음같아선 큰 딸 예물로 사위에게 만년필을 해주고 싶었다.
하지만 여력도 없었거니와 그런 선물은 살아가면서 꼭 만년필이란 선물이 어울릴 만한 일이 생겼을 때 해주고 싶다는 생각이다.
(우리 친정엄마는 사위에게 그당시 고가였던 상아로 만든 도장을 선물해줬다.)
나에게도 몽블랑이나 펠리컨 만년필을 누군가에게 선물할 수 있는 날이 꼭 오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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