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 위에서 인문학을 배우다
-근대 문화 유적지 군산을 찾아서
2014년 9월 28일 일요일, 휴일인데도 아침 일찍 눈을 떴다. 꿈벗 도서관에서 주관하는 <길 위의 인문학, 근대 개항장 답사기>라는 주제로 오늘은 손장원 교수님과 함께하는 군산 탐방이 있는 날이기 때문이다.
바삐 서둘렀음에도 불구하고 겨우겨우 제 시간에 도착했다. 놀라운 것은 참가 인원의 거의가 도착하여 자리에 앉아 있는 것이었다. 덕분에 차는 제 시간에 출발할 수 있었다. 이 첫 출발의 인상은 함께 가는 사람들과의 동질감과 더불어 친밀감마저 느끼게 해주었다. 그것은 다른 사람들도 나만큼이나 오늘 여행에 관심을 갖고 기대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창밖으로는 가랑비가 내리다 멈추기를 반복하였다. 아직 완연한 가을은 아니지만 곳곳에 가을의 정취를 느낄 수 있는 풍경이 펼쳐지고 있었고 나는 어느새 상념에 잠기었다. 오늘 탐방의 목적은 건축으로 바라보는 근대 개항장의 현대 모습이다. 과거의 흔적으로 남아 있는 건축물을 통해 나는 무엇을 보게 될 것인가. 그리고 과거의 시간으로 거슬러간다는 것은 어떤 의미가 있는 것일까. 지금의 이 버스, 교수님, 그리고 함께 떠나는 사람들과 더불어 오늘의 일정을 그냥 따라가다 보면 돌아오는 길에서는 분명 이 해답을 얻을 수 있으리라.
아침 식사를 소홀히 했을 참가자들을 위한 배려로 빵과 우유, 그리고 '길 위의 인문학'이라는 프린트가 새겨진 연두빛깔의 손수건이 지급되었다. 이어 사서 선생님의 간단한 인사, 그리고 오늘 함께 할 참여자들의 소개, 마지막으로 보다 유익한 시간이 될 수 있도록 도움을 주실 손장원 교수님의 말씀으로 차안은 잠시 활기를 띠었다.
차는 세 시간 가량 달려 목적지인 군산에 도착했다. 군산이란 장소는 내게는 어릴 적 추억이 있는 곳이기도 하다. 선산이 그곳에 있었던 탓에 명절이면 장항에서 배를 타고 군산으로 건너가 성묘를 하곤 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오늘 내가 둘러보게 될 군산은 그러한 추억의 장소가 아닌, 조정래의 소설 <아리랑>의 배경으로 등장했던 역사의 곡절을 겪은 군산의 모습에 가까울 것이다.
군산의 첫 인상은 한마디로 근대라는 시공간 속에 멈춰있는 장소 같았다. 그래서인지 버스에서 내리자 시간을 거꾸로 순간이동 한 것 같은 느낌에 주위가 낯설게 느껴졌다.
시간은 어느덧 정오, 곧바로 우리들은 점심을 먹기 위해 각자 흩어졌다. 나는 함께 참가한 지인과 근처 <고우당 게스트 하우스>의 야외 벤치에 앉아 집에서 준비해온 도시락을 먹었다. 정원 곳곳에 가을 햇살이 내려앉았다. 유리 가루가 하얗게 쏟아지는 것처럼 눈을 찌르듯 눈부신 가을 햇살은 비현실감 마저 느끼게 했다. 문득 군산이라는 도시의 분위기와 많이 닮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군산을 여행하는데 가장 좋은 계절이 지금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식사를 마친 후 우리 일행은 본격적인 여정에 들어갔다. 맨 먼저 도착한 곳은 <동국사東國寺>라는 일본식 절이었다. 지금은 조계종에서 관리하고 있다고 한다. 교수님은 일본 사찰의 특징이 <선禪>이기 때문에 참선參禪을 하기 위해서는 공간을 최소한으로 채우고, 색깔 또한 우리나라의 사찰과는 다르게 최대한 절제하여 흰색과 검정으로만 사용하고 있다고 설명해주셨다. 하지만 공간이 주는 이질감 때문이었을까? 대웅전에 들어 부처님께 참배를 올리려다가 그만두었다. 부처님의 자비가 나라와 절에 따라 달라질리 만무하건만 마음 한켠에서 어떤 거부감이 느껴졌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밖으로 나와 대웅전 뒤뜰을 돌아보니 대나무가 작은 숲을 이루고 있었다. 바람에 대숲이 술렁이는 소리를 듣고 있으려니 왠지 쓸쓸해졌다.
동국사에 이어 우리가 찾은 곳은 <구舊 군산부윤관사>이었다. '부윤'이란 말은 지금의 시장에 해당된다고 한다. 그러니 당시의 군산 시장이 살던 관사라고 이해하면 되는데 아쉽게도 지금은 식당으로 운용되고 있었다. 우리 일행은 식당주인에게 잠시 둘러볼 수 없겠냐는 양해를 구했다. 하지만 주인으로부터 '볼 게 없다'는 거절의 말을 들어야 했다. 하는 수 없이 우리는 길 가에 서 있는 석등과 허물어진 담장을 바라보는 것으로 족해야 했다.
교수님께서는 문화재로 지정되지는 않았지만 역사를 간직하고 있는 이런 건축물이 제대로 쓰임을 찾지 못하고 있는 것에 대해 애석해 하셨다. 커피 한 잔을 마시는 장소가 백 년. 이백 년의 시간을 머금고 있는 곳이라면 그 건축물이 지니고 있는 아우라를 활용하게 되는 것이 아니겠느냐는 말씀이셨다. 유럽에는 오래된 성을 개조하여 콘도처럼 이용되고 있는 곳이 많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성주가 된 기분으로 성에서 아침을 맞을 때의 기분은 단순한 숙박의 의미 이상이 아닐까.
다시 걸음을 잇대어 우리는<히로쓰 가옥>에 도착했다. 2층 목조건물로 된 일본식 구조의 집이었는데 복도에는 유리창을 달아 정원이 어디에서나 보일 수 있도록 설계되어 있었다. 그리고 복도를 따라 한쪽으로 방이 이어져 있었고 중간쯤에 2층으로 통하는 계단이 있었다. 2층 역시 복도와 방의 배열이 1층과 다름없이 일렬로 이어져 있었다. 일본식 가옥에서 볼 수 있는 '다다미'와 '도코노마'도 볼 수 있었다. 오랜만에 느껴보는 마루의 삐그덕거리는 소리와 발에 닿는 감촉에서 시간의 흐름을 느낄 수 있었다. 처음 이 집을 지을 당시에는 정원에 많은 공을 들이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건물을 나와 잠시 정원을 걸었다. 햇살은 무더웠지만 그늘은 서늘했다. 어쩐지 그 그늘 속에는 한민족의 슬픔이 서려있는 것만 같았다.
우리는 다음 일정을 위해 차량에 올라 인천의 홍예문과도 유사한 <해망굴>을 잠시 둘러보고 <구舊군산세관>에 도착했다. 제일 먼서 적 벽돌의 아름다운 색깔이 눈에 들어왔다. 벨기에에서 수입한 벽돌이라고 했다. 군산세관은 단단해 보이면서도 아름다웠는데 서울역을 축소해놓은 듯한 모습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한쪽에는 커다란 창고가 있었는데 그곳에 우리 민족으로부터 수탈한 쌀을 저장해두었다고 한다.
군산세관에 이어 <구舊 조선은행 군산지점>이었던 <군산 근대 건축관>에 들렀다. 은행 건물이었기 때문인지 한눈에 보아도 견고해보였다. 전시관은 2층으로 되어 있었다. 그 중에서 '금고 속 조선은행 이야기'코너에 적혀있던 구절이 제일 먼저 눈에 띠었다. "이 금고가 채워지기까지 우리 민족은 헐벗고 굶주려야 했다".라는.
나는 점점 무거워지는 걸음으로 은행장의 응접실로 쓰였다는 장소로 자리를 옮겼다. 그곳에는 당시 군산 시내의 모습들이 전시되어 있었는데 유리벽에는 "나라를 잃었던 자들아 그날을 기억하라" "경술국치庚戌國恥 1910년 8월 29일"이라는 글자가 쓰여 있었다.
불행의 역사를 돌아보는 여행은 무거운 짐을 이고 걸어가는 기분이었다. 일본인이 우리나라에 철도를 놓고 유럽식 건물을 짓고 과학의 발전을 가져다 주었던 외향적 모습의 뒤편에서, 우리 민족의 고통은 선명하게 되살아나 가슴속으로 전해지는 까닭이었다.
관람 후, 군산내항부잔교가 설치된 항구를 잠시 둘러보고 야외 벤치에 앉아 잠시 숨을 돌렸다. 그리고 오늘 일정의 마지막인 <이영춘 가옥>으로 향했다. 이영춘 박사가 연희의전을 졸업한 후 군산에 자리 잡게 된 배경에는 구마모토라는 일본인 대 지주가 농장 부설 의료원을 만들게 되면서 이영춘 박사가 이곳으로 부임하게 된 것이다. 이영춘 박사는 이때부터 농촌보건 위생 사업에 자신의 생애를 바치며 민족에 봉사하는 삶을 사셨다고 한다.
이영춘 박사의 가옥은 유럽식 거실에 벽난로가 있는가하면 일본 전통 양식인 다다미와 도코노마, 그리고 한국식 온돌이 있는 혼합형 구조로 되어 있었다. 아담하지만 오랜 세월을 증명하듯 정원엔 아름드리 큰 나무들이 서 있었고, 그 아래로 야생화, 담쟁이, 이름 모를 꽃들이 조화를 이루며 마당을 장식하고 있었다. 모두 둘러본 후에 입구에 있는 '이영춘박사 교과서 실리기 운동'에 서명을 하고 정원에서 단체 사진을 찍는 것으로 오늘 군산 탐방 일정을 모두 마쳤다.
우리 일행은 이영춘박사가 설립했다는 군산간호대학에 주차되어 있던 버스에 올랐다. 돌아오는 길은 예상했던 대로 많이 막혔다.
군산에서 도착지까지 이동하는 동안 창밖의 풍경들은 점점 어둠속으로 사라져가고 있었다. 오늘이라는 시간과 함께... 시간은 멈추는 법이 없고, 그래서 우리는 늘 현재라는 시간 위에 발을 딛고 서 있다.
나누어준 손수건에 적힌 <길 위의 인문학>이라는 글자가 눈에 들어온다. 인문학은 인간이 중심이 되어 살아가는 세상에 대한 연구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보통 철학, 문학, 사학을 일컫는데 이러한 학문들이 지금의 삶과 연관이 되지 않는다면 무슨 의미가 있을까? 철학이든 문학이든 역사학이든 우리는 그러한 인문학을 통해 현재를 더욱 단단하게 주체적으로 살아가는 힘을 얻게 되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러므로 <길 위의 인문학>이라는 말은 인문학이 어떠한 개념이나 관념으로서 존재하는 것이 아닌, 오로지 자신만의 걸음으로 걸어가는 것이며, 그것은 현재라는 길 위에서 이루어져야 한다는 의미일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오늘 과거의 흔적을 돌아보는 일이 봉인된 시간의 전시장을 관람하듯 무심히 바라볼 수 없었던 것은, 그 시간은 단절된 것이 아니라 현재와 미래로 물결처럼 이어지고 있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군산은 근대 역사에서 우리 민족의 뼈아픈 시간을 간직하고 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곳을 보존하고 잊지 않아야 하는 것은, 지금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답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일 것이다. 과거는 어떤 식으로든 결과를 남긴다. 그리고 우리는 그 결과 위에서 오늘을 살아갈 수밖에 없으며, 미래의 지향점을 정하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이유만으로도 비록 그것이 찬란한 영광의 시간이든 치욕의 불행한 시간이든, 나름의 가치가 있는 것이 아닐까?
이런 저런 생각을 하다 보니 어느덧 차는 처음 출발했던 장소로 도착해 있었고 거리에는 가을비가 내리고 있었다.
오늘 하루 애써주신 교수님, 그리고 인연이 된 참가자들, 작은 사고도 없이 무사히 마칠 수 있도록 앞에서 뒤에서 소리 없이 이끌어주었던 사서 선생님들과 스텝들...... 서로 감사의 인사를 주고받으며 아쉬운 마음으로 헤어졌다.
마지막으로 교수님께서는 오늘 같은 유익한 자리를 기획하고 마련해 준 사서 선생님의 노고를 전하며, 앞으로도 공공도서관을 많이 이용해달라는 말씀을 하셨다. 사실 도서관이란 곳은 자본이 될 수 있는 뭔가를 생산해내는 공간이 아니기에, 사회적 관심에서 멀어지고 투자에 소외되는 측면도 없지 않는 것 같다. 하지만 도서관은 그러한 자본의 논리로 존재가치를 판단할 수 없는 고유한 영역을 갖고 있는 곳이다. 오히려 그러한 특성은 오늘날의 인문학 열풍을 지속적으로 이끌어갈 역할 담당자로서의 최적의 조건이 되는지도 모른다
건강한 사회가 '조화'와 '균형'을 유지하는 것이라고 한다면, 자본사회에서의 인문학은 한쪽으로 기울어 있는 저울의 추를 중심에 놓아 줄지도 모른다. 일 년여 동안 도서관에서 봉사 활동을 한 경험이 있는 나이기에 도서관에 대한 애착 또한 남다른 것이겠지만, 도서관이 지금보다 활성화되고 문화공간으로서 자리매김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는 바람이다. 문화적 인프라로서 말이다.
덧글> 답사기를 써달라는 부탁을 받고...
여전히 아름다운 나의 언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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