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 커피를 마시면서 다시보기로 sbs 스페셜을 보았다.
<작은사치>에 대한 내용이었다.
요즘 사람들의 소비형태와 삶의 의식에 관한 것이었는데 밥은 김밥같은 걸로 간단히 때우고 디저트로는
밥값의 서너배를 지출하면서 행복해하는 모습이 화면에 잡혔다.
자신의 만족과 즐거움을 위해 아깝지 않게 돈으로 교환하는 것이다.
그것은 돈 만 원으로 식사를 하며 사치하기는 어렵지만 디저트로는 사치가 가능하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리고 뒤이어 여러 예가 화면에 나왔다.
네일 아트를 한 번 하는데 십 오만원이라는 돈을 들이는 가정주부, 그리고 아이들을
사진에 담기 위해 카메라에 거금을 들이는 남편, 운동화를 사모으는 남자, 주말이면 여행가는 여자...
대신 그 외의 다른 곳에서는 정말 아끼고 아낀다.
덧붙여 합리적이라는 말에 대해 어떤 학자가 말한다.
예전에는 꼭 필요한 것을 싸게 사는 것이었다고 한다면
요즘은 꼭 필요한 것은 아니지만 비싸더라도 자기가 거기에서 즐거움을 얻을 수 있다면 소비하는 것이
합리적이라는 의식으로 변했다고 한다.
텔레비젼을 보면서 그런 스타일의 삶이 바람직해보이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지금 사회의 그늘을 반영하는 것만
같아 씁쓸해지기도 했다.
모두들 자기 울타리 속에서 자기만의 행복을 추구하는 것, 이것은 요즘 인문학 강의에서 말하는 주체적인 삶이 될 수도 있겠지만
한 가지가 빠진 것이 있다면 그것은 자신이 속해있는 사회나 타인에 대한 관심이다.
예전 어떤 책에서 이런 글을 읽은 적이 있다.
요즘 엄마들은 자식을 키우는 데 있어서는 오로지 자기 아이만을 생각하면서 키운다고...
예전의 엄마들은 친척들의 아이, 자식의 친구들, 옆집 아이들까지 넓게 시선을 두며 자식을 키웠는데,
요즘 여성들은 더 많이 배우고 더 많이 현명해졌음에도 불구하고, 바라보는 시야는 점점 좁아지는 것은 아이러니하다고 했다.
사회에 대한 관심을 갖는 것은 거기에 대해 적극적으로 행동하지 않는다고 해도 무관심과는 전혀 다른 이야기가 아닐까.
생각이나 시선이 사회속에 있는 것과 자기 안에 있는 것과는 차원이 다른 문제이다.
아이를 키우더라도 사회속의 아이를 생각하며 키우는 것과 자기의 아이만을 생각하며 키우는 것은
그 결과가 다를 것이기 때문이다.
어쩌면 사람들이 그런 의식을 갖게 된 데는 사실 '무기력'이란 것을 알게모르게 체험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한계를 알게 되었다는 것, 아무리 노력해도 부자가 될 수 없고, 아무리 노력해도 사회는 변화하지 않을 거라는 의식 속에서
태어난 것이 '개인의 행복 추구'로 포장된 개인주의인지도 모른다.
얼마전 영화 <her, 그녀>를 보았다.
가까운 미래, 하지만 오늘날에 이미 일어나고 있는 사람과의 관계 맺는 방식에 대해 질문을 던지는 내용이었다.
한 남자가 컴퓨터와 사랑에 빠지게 되는데 어느날 길을 가다 다른 사람들을 보니 모두들 자기처럼 컴퓨터와 대화하며
행복한 표정으로 지나가고 있었다.
알고보니 그 컴퓨터의 주인공은 다른 수 많은 사람과도 접촉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제 사람이 다른 사람의 체온을 느낄 기회는 점점 줄어간다.
오로지 자신의 체온으로만 몸을 따뜻하게 덥히며 살아간다는 것은 무사한 날들에서는 상관없겠지만
그 체온이 유지 되지 않는 상황이 찾아왔을 때는 누구에게도 기댈 수 없는 극한의 절망만이 남게 되지 않을까...
그래서 홀로 서 있는 사회에서는 누구나 쉽게 약자가 될 수 있는 것이고,
자살률이 높아지는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너무 비관적일까?
풀들은 서로 기대어서 산다.
풀이 쓰러지지 않는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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