속눈썹의 효능
이은규
때로 헤어진 줄 모르고 헤어지는 것들이 있다
가는 봄과
당신이라는 호칭
가슴을 여미던 단추 그리고 속눈썹 같은 것들
돌려받은 책장 사이에서 만난, 속눈썹
눈에 밟힌다는 건 마음을 찌른다는 것
건네준 사람의 것일까, 아니면 건네받은 사람
온 곳을 모르므로 누구에게도 갈 수 없는 마음일 때
깜박임의 습관을 잊고 초승달로 누운
지난봄을 펼치면 주문 같은 단어에 밑줄이 있고
이미 증오인 새봄을 펼쳐도 속눈썹 하나 누워 있을 뿐
책장을 넘기는 바람에도 날아가지 않은
출처 모를 기억만 떠나는 방법을 잊었다
아지랑이의 착란을 걷다
눈에 든 꽃가루를 호- 하고 불어주던 당신의 입김
후두둑, 떨어지던 단추 그리고 한 잎의 속눈썹
언제 헤어진 줄 모르는 것들에게는 수소문이 없다
벌써 늦게 알았거나 이미 일찍 몰랐으므로
혼자의 꽃놀이에 다래끼를 얻어온 날, 그럼에도 불구하고 올 것은 온다는 역설처럼 당신의 입김 없이도 봄날은 간다
화농의 봄, 다래끼
주문의 말 없이 스스로 주문인 마음으로
한 잎의 기억을
당신 이마와 닮은 돌멩이 사이에 숨겨놓고 오는 밤
책장을 펼치면 속눈썹 하나 다시 뜨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돌아올 거라 믿는, 꽃달
‘놓치다, 봄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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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만치 나비 난다
귓바퀴에 봄을 환기시키는 운율로
흰 날개에
왜 기생나비라는 이름이 주어졌을까
색기(色氣)없는 나비는 살아서 죽은 나비
모든 색을 날려 보낸 날개가 푸르게 희다
잡힐 듯 잡힐 듯, 읽히지 않는 나비의 문장 위로
먼 곳의 네 전언이 거기 그렇게 일렁인다
앵초꽃이 앵초앵초 배후로 환하다
바람이 수놓은 습기에
흰 피가 흐르는 나비 날개가 젖는다
젖은 날개의 수면에 햇살처럼 비치는 네 얼굴
살아서 죽을 날들이 잠시 잊힌다
봄날 나비를 쫓는 일이란
내 기다림의 일처럼 네게 닿는 순간 꿈이다
꿈보다 좋은 생시가 기억으로 남는 순간
그 시간은 살아서 죽은 나날들
바람이 앵초 꽃잎에 앉아
찰랑, 허공을 깨뜨린다
기록되지 않을 나비의 문장에 오래 귀 기울인다
꼭 한 뼘씩 손을 벗어나는 나비처럼
꼭 한 뼘이 모자라 닿지 못하는 곳에 네가 있다
어느 날 저 나비가
허공 무덤으로 스밀 것을 나는 알지 못한다
봄날, 기다리는 안부는 언제나 멀다
―시집『다정한 호칭』(2012. 문학동네)
*
시가 참 곱다, 섬세하다.
지금은 가을, 그러나 이순간 봄날의 마음이 내게 안긴다
봄날...
그래, 그런 날이 있었지
봄이란 계절은 기억하는 것으로도 꿈결같구나.
나비의 날갯짓처럼 가이없이 아득하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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