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

풀의 신경계/ 나희덕

kiku929 2016. 4. 29. 22:39







풀의 신경계



나희덕



풀은 돋아난다

일구지 않은 흙이라면 어디든지


흙 위에 돋은 혓바늘처럼

흙의 피를 빨아들이는 솜뭉치처럼

날카롭게 때로는 부드럽게


흙과 물기가 닿는 곳이라면 어디든지

풀의 신경계는 뻗어간다


바람이 스치기만 해도

풀은 풀과 흔들리고 풀은 풀을 업어 달리고 매달리고

풀은 물결기계처럼 돌아가기 시작한다

더 이상 흔들릴 수 없을 때까지


풀의 신경섬유는 자주 뒤엉키지만

서로를 삼키지는 않는다


다른 몸도 자기 몸이었다는 듯 휘거나 휘감아들인다

가느다란 혀끝으로 다른 혀를 찾고 있다


풀 속에서는 풀을 볼 수 없고

다만 만질 수 있을 뿐


제 몸을 뜯어 달아나고 싶지만

뿌리박힌 대지를 끝내 벗어나지 못해

소용돌이치는 풀,

그 소용돌이를 타고 어디론가 가고 싶고

나는 자꾸 말을 더둠고

매순간 다르게 발음되는 의성어들이 끓어오르고


풀은 너무 멀리 간다

더 이상 서로를 만질 수 없을 때까지



-나희덕 시집 『말들이 돌아오는 시간 』중에서







*

밤에 쉽게 잠을 이루지 못하는 습관이 생긴 지 오래.

그래서 아주 가끔씩 눈꺼풀 위로 나른한 잠이 무겁게 남아 있는 날은 기분이 좋아진다.

대부분 내가 맞춰 놓은 알람 소리 보다 먼저 깨어난다.

불면을 설명하자면 이렇다. 스위치를 탁 끄면 전원이 끊겨야 하는데 계속 전원이 흐르는 기분이랄까.

그래서 잠을 자면서도 머릿속에는 갖은 이야기들이 떠오른다. 순서도 없이 뒤죽박죽으로...

얼핏 잠들어도 수시로 깨어난다.

나의 신경계가 풀처럼 자꾸만 어디론가 뻗어나가기 때문인 것 같다.




**

풀이 있는 마당에 살고 싶었던 내 친구가 있다.

그 친구는 자기 소원대로 풀이 있는 마당을 갖게 되었다.

그리고 일 년이 지나고 내게 말했다.

풀이 무섭다고. 맨날 뽑아내도 금세 자라 마당을 뒤덮는다고.

그 친구는 지금 아파트 15층에서 산다.

제어가 안 되는 속도는 공포스럽기조차 하다.






'!시' 카테고리의 다른 글

공원 外 1 / J .프레베르  (0) 2016.05.01
나는 아픈 사람들을 가엾어 하노라 / 김영승  (0) 2016.04.30
보고 싶은 오빠 / 김언희  (0) 2016.04.29
냉이꽃 / 송찬호  (0) 2016.04.28
싱고 / 신미나  (0) 2016.04.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