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련
박은정
아침은 붉고 연못은 파르스름했다
다리가 젖을수록 치마는 부풀어오르고 하나씩 떨어져나가는 이목구비들
많은 방이 나타났다 무릎을 당기면 사방이 사라지는, 굴절되는 천장 소리 죽은 아가일 무늬
너의 손을 잡고 꽃을 꺾었지 산 자가 죽은 자를 닮고 죽은 자가 산 자의 모습에 취해
깊은 곳으로 침잠하는 파사의 주소
이 야만은 무엇인가요 얼굴을 휘감는 수초들의 무표정, 문을 두드리면 인기척이 흩어지는
동공을 부수는 한 뼘의 빛
차고 희고 막막한 바람 뒤로 나무들의 병색이 짙어지고 불길한 징조처럼 손톱의 반달이 사라졌다
따뜻한 침대와 낡은 복사뼈를 흔들며, 나는 울었다 모든 것을 수포로 만드는 자세로
천 개의 유리로 덮인 꿈을 꾸었지
날개를 감추고 지나는 물고기들과 평온한 이마를 드러낸 채 흔들리는 뿌리들
잠자리 한 마리가 수련 주위를 맴돈다
손을 내밀면
가만히 떠오르는 그 무엇
-시집『아무도 모르게 어른이 되어』중에서 / (문학동네,2015)
이렇게 시를 쓰면 좋겠다는 생각...
이름을 지어줄 수 없는 어떤 것들,
분명 존재는 하지만 누구의 손에도 잡혀본 적 없는 희미하고도 오래도록 가슴에 떠도는 어떤 것들.
언어는 그런 것과 맞닥뜨릴 때 한계를 느끼게 된다.
그 한계를 극복하려는 치열한 싸움의 결과가
시가 되는 것이 아닌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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