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

길의 침묵 / 김명인

kiku929 2016. 8. 27. 23:18




길의 침묵




김명인



긴 골목길이 어스름 속으로
강물처럼 흘러가는 저녁을 지켜본다
그 착란 속으로 오랫동안 배를 저어
물살의 중심으로 나아갔지만, 강물은
금세 흐름을 바꾸어 스스로의 길을 지우고
어느덧 나는 내 소용돌이 안쪽으로 떠밀려 와 있다
그러고 보니, 낮에는 언덕 위 아카시아숲을
바람이 휩쓸고 지나갔다, 어둠 속이지만
아직도 나무가 제 우듬지를 세우려고 애쓰는지
침묵의 시간을 거스르는
이 물음이 지금의 풍경 안에서 생겨나 듯
상상도 창 하나의 배경으로 떠오르는 것
창의 부분 속으로 한 사람이
어둡게 걸어왔다가 풍경 밖으로 사라지고
한동안 그쪽으로는
아무도 나타나지 않았다
그 사람의 우연에 대해서 생각하지만
말할 수 없는 것, 침묵은 필경 그런 것이다
나는 창 하나의 넓이만큼만 저 캄캄함을 본다
그 속에서도 바람은
안에서 불고 밖에서도 분다
분간이 안 될 정도로 길은 이미 지워졌지만
누구나 제 안에서 들끓는 길의 침묵을
울면서 들어야 할 때도 있는 것이다



- 시집 『길의침묵 (문학과 지성사 1999)






"나는 창 하나의 넓이만큼만 저 캄캄함을 본다"


나는 지금 현관 옆 작은 방의 책상에서 이 글을 쓴다.

스탠드가 켜져 있고 그 위로는 작은 창문이 있다.

나의 글에 자주 '창'이 나오는 것은 바로 이 방의 창문이거나 베란다의 창문이다.

밤에는 주로 이 창문을 통해 세상을 보고, 그래서 그 세상은 늘 캄캄한 세상이다.

내가 창문을 통해 밖을 내다볼 때 어쩌면 나는 세상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창을 바라보고 있는 나의 시선을 보고 있는지 모른다.

창문을 통해 볼 수 있는 것은 아주 많지만,

그중 내가 포착하는 것은 바로 그 순간 나의 정서이며 감정이다.

그러므로 창의 대면은 곧 나와의 대면이라 바꿔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동안 얼마나 많은 내가 나의 창에 왔다가 멀어지곤 했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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