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

얼음처럼 /이장욱

kiku929 2016. 12. 15. 23:24



얼음처럼



이장욱

 

 

나는 정지한 세계를 사랑하려고 했다.

자신을 의심하지 않는 세계를

나는 자꾸 물과 멀어졌으며

매우 견고한 침묵을 갖게 되었다.

 

나의 내부에서

나의 끝까지를 다 볼 수 있을 때까지.

저 너머에서

조금씩 투명해지는 것들을.

 

그것은 꽉 쥔 주먹이라든가

텅 빈 손바닥 같은 것일까?

길고 뾰족한 고드름처럼 지상을 겨누거나

폭설처럼 모든 걸 덮을 수도 있겠지만

그것이 가위바위보는 아니다.

맹세도 아니다.

 

내부의 뜻밖의 계절을 만드는 나무 같은 것

 

오늘 아침은 영원이 아니라서 가능하다

는 생각 같은 것

알 수 없이 변하는 물의 표면을 닮은.

 

조금씩 녹아가면서 누군가

아아,

겨울이구나.

희미해.

중얼거렸다.

 

 

-이장욱 시집영원이 아니라서 가능한』 (문학과지성사, 2016)





  이 시는 하나의 이미지로 시적 자아의 정체성을 고정하는 것을 스스로 허물어버린다. 언어의 진행은

시적 자아의 인격적 동일성을 박탈하고 익명화한다. 그의 시들에서 '자아의 지배'는 늘 실패한다

"오늘 아침은 영원이 아니라서 가능하다"라는 문장은 단어의 문장이 아니며, 시의 화자는 간접적인

인용 방식을 통해 그 진술로부터 내적 거리를 만들어 낸다.

  '영원한 자아'는 존재할 수 없는 개념이다. 자아와 주체는 하나의 시작점이 있어야 하고, 영원이라는

시간대는 시작과 끝을 부정하는 시간대이기 때문이다. 영원을 말하는 것은 주체이지만, 주체의 성립은 영원에

도달할 수 없는 조건이다. 레비나스의 개념을 빌리면 '존재자 없는 존재'만이 시작도 끝도 없는 시간을 산다.

시 쓰기는 주체와 자아의 실패를 보여주면서 '존재자 없는 존재'의 언어와 리듬에 한없이 다가간다


글 : 이광호

대산문화, 제 24회 대산문학상 수상작 리뷰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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