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면
강정
오래 전에 본 적 있는 그가 마침내 나를 점령한다
창가에서 마른 종잇장들이 찢어져
새하얀 분(粉)으로 흩어진다
몸이 기억하는 당신의 살냄새는 이름 없이 시선을 끌어당기는 여린 꽃잎을 닮았다
낮에 본 자전거 바퀴살이 허공에서 별들을 탄주하고
잠든 고양이의 꼬리에선 부지불식 이야기가 튕겨져나온다
내 몸을 껴입은 그가 밤이 가라앉는 속도에 맞춰
거대한 산처럼 자라나 풍경을 지운다
천체를 머리맡에 옮겨다놓는 이 풍성한 은닉 속엔
한 점의 자애도 없다 온통 가시뿐인 은하의 속절없는 일침뿐이다
-시집 <<들려주려니 말이라 했지만>> 중에서 (2005)
*
가을 오면서가장 달라진 것은 불면이 사라진 것이었다.
물론 한 밤중에도 여러번 깨기는 하지만 예전처럼 꼬박 밤을 새우거나 먼동이 터서야
겨우 잠에 드는 것은 아니라는 말이다.
졸음이 오는 신호가 얼마나 반가운 것인지 불면의 고통을 모르는 사람은 알 수 없겠지만
눈꺼풀 위에 나른하게 졸리다는 느낌이 들 때면 나는 행복해지기도 한다.
오래전 병원에 있을 때 한 달 넘게 잠 한숨을 못잔 적이 있다.
약의 성분 때문인지 항상 의식이 깨어 있어서 너무나도 고통스러웠다.
졸음의 기미는 아예 없고 밤새도록 시계만 보며 지새워야 했던 시간이었다.
그것은 미각이나 후각을 잃은 고통과 비숫할 것이다.
요즘도 늦게 자는 것은 여전하지만
그래도 잘 수 있어서 행복하다.
그것은 자애라고도 할 수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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