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

신문 / 유종인

kiku929 2017. 7. 31. 19:18



신문



유종인



활자들만 모른 체하면

신문은 이리저리 접히는 보자기,

나는 신문이 언론일 때보다

쓸쓸한 마른 보자기일 때가 좋다


그 신문지를 펼쳐놓고 일요일 오후가

그 누에 발톱을 툭툭 깎아 내놓을 때가 좋다


어느날 삼천 원 주고 산 춘란 몇 촉을

그 활자의 만조백관들 위에 펼쳐놓고

썩은 뿌리를 가다듬을 때의 초록이 좋다


예전에 파놓고 쓰지않는 낙관 돌들

이마에 붉은 인주를 묻혀

흉흉한 사회면 기사에 붉은 장미꽃을

가만히 눌러 피울 때가 좋다

아무래도 굴풋한 날 당신이

푸줏간에서 끊어온 소고기 두어 근

핏물이 밴 활자들 신문지째로 건넬 때의 그 시장기가 좋다


이젠 신문 위에 당신 손 좀 올려보게

손목부터 다섯 손가락 가만히 초록 사인펜으로 본떠놓고

혼자일 때

내 손을 가만히 대보는 오후의 적막이 좋다


-『현대시학』2015년 7월호




*

이제 신문은 아무래도 저 멀리로 가버린 것만 같다.

지하철에서 신문을 펼치고 있는 풍경도

배달된 신문을 읽으며 아침을 여는 풍경도 다시 돌아오지는 않을 것이다


신문에서 배어나오는 잉크냄새가 아침을 여는 처음 냄새처럼

하루가 다시 시작되었구나 하는 실감이 있었는데 이제는 그러한 것도 다 추억이다.

이제 신문은 감성적으로 떠올리게 되는 그리운 유물로나 존재한다.


신문이 성행한 시절, 그때는 활자로 된 모든 것이 성행했던 것 같다.

신문에 소설이 연재되고 그 소설이 책으로 나오면 베스트셀러였다.

신문에 시가 올라오면 많은 사람들에게 기억되었다.

1월1일 신문마다 커다랗게 장식되는 신춘문예는 관심없는 사람도 한번은 흩어보는

대중의 관심사였다.

신문이 쇠퇴하면서 활자로 된 문학도 함께 쇠퇴하게 된 것만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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