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 서비스 정신이 가장 부족한 장르. 알아서 찾아오고 알아서 맛을 보고 알아서 욕을 하든 칭찬을 하든 혼을 빼앗기든 아무튼 알아서 알아주기를 바라는 장르. 그러니 온갖 서비스가 난무하고 온갖 서비스가 우의를 점하는 시대에 전혀 걸맞지 않은 장르. 어울리기도 힘들고 어울리기를 바라지도 않는 장르. 어울리려고 노력해봤자 그 또한 알아서 알아주기를 바라는 형식에서 크게 벗어날 수 없는 장르. 어찌 해도 안 되는 반서비스의 장르.
-『MOOK 통』(2017 VOL.1) 김언 산문특집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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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는 어렵다. 이해하기가 힘들다. 왜 시를 굳이 어렵게 쓰느냐.
이런 말들을 종종 한다. 나 역시 그런 의문을 품기도 했었다. 소통되지 않는 시가 무슨 의미가 있을까, 하는.
그러나 시라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게 되면 조금은 그러한 질문에 스스로 답을 얻을 수가 있다.
대부분 간과하는 것이 '시가 모국어로 쓰여진 극의 예술'이라는 것이다. 산문이나 소설 희곡과 같은 것이 예술이 아니라는 것이 아니라
여러 장르 중에서도 언어와 정면하여 가장 효율적으로 언어를 다루면서 시인의 내면을 담아내어야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시에서도 서사적인 이야기가 들어 있는 시는 이해가 쉽지만 어떤 관념적인 것을 이미지로 나타내는 시들은 어려울 수밖에 없다.
미술에서도 사실적으로 그려진 그림은 어떤 것을 그렸는지 금방 이해가 되지만 추상화나 초현실주의 작품들은 보는 사람 각각
다른 감상을 하게 된다.
미술이 그렇듯이 좋은 시는 '창조적 오독'이 많은 시라고 한다.
시인이 말하고 시인이 답을 알려주는 친절한 시가 아니라 그저 제시만 하는 시, 그래서 독자로 하여금 시를 읽고 나서 생각하게 하는 시.
'시는 시 밖에 있다'는 말처럼...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모국어로 되어 있다는 것 때문에 쉽게 이해할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해하기 쉽도록 의도하고 쓴다면 그것은 시가 아니라 에세이의 장르가 될 수밖에 없다.
하여간 시라는 장르는 그래서 고독할 수밖에 없는 장르인 것만은 틀림 없는 것 같다.
그것이 어쩔 수 없는, 어쩌지 못하는, 시의 태생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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