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에게는 스스로 삶의 심연을 보았다는 것 외에 다른 보상이 없다"고 말한 사람은 이성복이었지만, 우리는 누구보다도 시만 가질 수 있는 리듬과 시만 닿을 수 있는 심연과 시로써만 감각할 수 있는 세계를 잘 알고 있잖니. 시를 쓰고 집으로 가는 날은 공기 자체가 달라. 이미 등단 3년차의 좋은 시인이어서 너도 잘 알겠지만, 시를 쓴 날엔 어떤 심연을 경험한 느낌이 든단다. 아니, 그 느낌은 차라리 언어 바깥의 일이어서 어떤 말로도 당도할 수 없는 영역이라고 우리는 말해야겠지. 산문을 쓰고 집에 가는 날엔 나의 노동에 대한 대가를 지불받는 느낌이라면 시를 쓰고 집에 가는 날엔 나의 삶 자체가 위로 받는 느낌이야. 아무도 읽어주지 않을지라로 내가 내 삶을 살아내고 있다는 확신, 내가 나의 운명 같은 것을 피하지 않고 정면으로 마주서고 있다는 잠연한 수긍이 내내 따라 와. 이를테면 나의 모든 산문은 단 한 편의 시를 쓰기 위한 연습이라고 말해도 결코 과장이 아닐 거야.
그래서 언제나 더 힘든 쪽은 시를 쓰는 일이란다. 카페에서 노트북에 시를 쓰고 있는 30대 후반의 사내를 생각해보렴. 그 지지리궁상이 미치도록 지겨울 때가 사실 더 많지만 나의 감각들은 언제나 시를 쓰려고 아우성이야.
-<시를 쓸 때와 산문을 쓸 때> 박진성 글 중에서 /『시와 반시』(2016년 여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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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진성 시인은 시 못지 않게 산문 역시 유려하게 쓰는 시인이다. 읽고 있으면 참 잘 쓴다,그런 생각이 절로 들게 한다. 그러한 시인도 시를 쓰는 어려움을 토로한다.
산문은 쓰려고 마음 먹으면 어떻게든 써진다. 쓰기 싫어도 써야 한다면 싫은 마음을 안고서도 밀고 나갈 수가 있다. 그러나 시는 그것이 잘 안 된다. 산문은 앉아 있으면 몇 글자라도 쓸 수 있지만 시는 오래 앉아 있어도, 밤을 새워도, 쓰고 싶다는 마음이 강렬해도 한 글자도 쓰지 못하기도 한다. 산문을 '쓴다' 라고 한다면, 시는 '써진다'라고 해야 옳을지도 모른다.
시는 내가 쓰는 것이기도 하지만 그렇다고 꼭 내가 쓴다고도 말할 수 없는 부분이 있기 때문이다.
시는 알수록 어렵고 쓸수록 더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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