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의 오염과 부패 정도와는 무관하게, 사실 인간에게는 아직도 숭고하고 아름다운 의지와 그에 수반한 행위들이 많다.
그중 근원적 '아름다움'에 대한 탐구가 있고 그것을 우리는 예술이라고 부른다. '생명'에 대한 믿음과 그 탐구가 있고 그것을 '종교'라고 부른다. 개인적 '생존'에 대한 건강한 탐구가 있고 그것을 ' 수련'이라고 부른다. 이런 긍정적인 행위들에게는 특정한 가이드라인이 있고 추구하는 목표가 있다.
그런데 그중에서 추구점도 업시 목표도 없이, 그 행위 자체가 의미이고 목표이면서 모든 것에 대한 감사와 경의를 평온함으로써 마음에 담는 특이한 일이 있다. 그것을 바로 '차(茶)'를 끓이는 행위이고 우리는 이를 다도(茶道)라고 부른다.
예술은 '아름다우면서' 동시에 '필요 없는'것에 가깝고 또한 그것에 집중하기 때문이다. 좀 더 정확히 표현하자면 예술은 가치 있는 것이지만 없다고 우리 생존에 위협이 되는 건 아니다. 그러나 예술이 우리를 더욱 인간이게 하며 더욱 사유에 폭넓은 의문과 여지를 제공하듯이, 다도 또한 생활에 없어도 상관없지만 '맑음'이라는 개념과 실제를 우리 몸과 마음 모두에게 함양하게끔 해주는 어떤 풍요로운 방법론으로 존재하는 것이다.
우리나라나 일본 다도의 경우, 실제로 행다(行茶)를 배워보면 다구들을 사용하는 방법 중 가장 함축적이고 효율적인 최선의 방법으로서 그 이론이 정리되어 간다. 가장 단순한 것이 가장 아름답다는 사상 위헤, 그 방법에 공을 들인다는 사상적 바탕이 행위로서 깔려 있는 것이다. 차에서 맑음은 정신과 육체 모두에게 작용케 하려는 의지의 소산이라는 점에서 또한 종고적이고 수련 같다. 그러나 다도가 예술도, 종교도 수련도 아닌 이유는 그것이 목표하는 어떤 지향점을 갖지 않기 때문이다. ... 굳이 표현하자면 '맑음'을 통해 세상 만물에 대한 경의를 즐기는 어떤 '여유'다.
다도의 물 끓이는 체계는 결국 물을 더 좋게 하기 위한 방법에서 기인했다고 보아도 무리는 없다. 물은 역사적으로 인류에게 가장 오래된 '맑음'의 표상적 존재였다. 물은 만물과 생명의 근원이고 영양학적으로도 인문학적으로도 걸쳐져 있는 핵심 사유로서의 물신이었고 지금도 그렇다.
'칠분차 삼분정(七分茶 三分情)'이라는 말이 있다. 이는 '차를 따를 때는 잔의 칠분만 따르고 나머지 빈 삼분에는 정을 따른다'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는데 찻잔 하나에 물질과 정서를 모두 담는 확실히 보여주는 예다.
우리는 우리의 부족함과 저열함을 받아들일 때 우리의 생이 예술에 가까워지는 것이다. 그런 지속적인 인정과 사물에 대한 경의 속에서 빙열이 물드는 모습을 보는 것이 다도의 묘미이며, 맑음 혹은 맑음에 대한 의지를 자신의 찻잔에 담아오는 동안 우리는 순간과 시간에 대해 자연스레 받아들일 것이다. 그 아름다움은 결코 하루 아침에 구현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도자기란 근본적으로 흙에 유리를 바르거나 구은 것이고 그 과정에서 나타나는 색상과 조형미로 표현되는 예술성을 연구하는 걸 도자학이라고 한다. 유리와 흙은 당연히 용융점도 반응 점도 달라서 가마에서 소성될 때 부피의 변화 등 여러 가지 열변형 효과에 의해 미세한 균열이 무늬처럼 표현이 되어 나타나는 데, 도자학에선 이를 관입(貫入), 또는 빙열(氷熱)이라 부른다.
내가 머물던 자리가 항상 아름다울 순 없어도, 내가 사용하던 물건들에 아름다운 정신이나 그 흔적이 깃들 수 있다면 그 물신이 어찌 의미 없다고 할 수 있을까.
사람에게 돌아본다는 일은 결국 자신의 장지를 보는 것과 같다. 내가 누울 곳을 내가 아름답게 정리할 수 있다면, 그것보다 보람된 일도 드물 것이다. 그것은 자기가 자신에게 다하는 어떤 충(忠)이다.
-《시인동네》(2018년 01월호)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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