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

흔적 / 나희덕

kiku929 2018. 1. 29. 15:25




흔적




나희덕




나는 무엇으로 찢겨진 몸일까


유난히 엷고 어룽진 쪽을

여기에 대보고 저기에도 대본다


텃밭에 나가 귀퉁이가 찢겨진 열무잎에도 대보고

그 위에 앉은 흰누에 나방의 날개에도 대보고

햇빛 좋은 오후 걸레를 삶아 널면서

펄럭이며 말라가는 그 헝겊조각에도 대보고

마사목에 친친 감겨 신음하는 어린 나뭇가지에도 대보고

바닷물에 오래 절여진 검은 해초 뿌리에도 대보고

시장에서 사온 조개의 그 둥근 무늬에도 대보고

잠든 딸아이의 머리띠를 벗겨주다가 그 띠에도 슬몃 대보고

밤늦게 돌아온 남편의 옷을 털면서 거기 묻어온

개미 한마리의 하염없는 기어감에 대보기도 하다가


나는 무엇으로부터 찢겨진 몸일까

물에 닿으면 제일 먼저 젖어드는 곳이 있어

여기에 대보고 저기게도 대보지만

참 알 수가 없다

종소리가 들리면 조금씩 아파오는 곳이 있을 뿐



- 시집 『어두워진다는 것』(창비 2001) 중에서






'!시' 카테고리의 다른 글

고통에 대하여 / 이승훈  (0) 2018.02.03
사진 / 김영승  (0) 2018.02.01
이방의 사람 / 박은정  (0) 2018.01.29
안녕, 나는 이사 간다 / 리산  (0) 2018.01.14
하얀 / 임솔야  (0) 2018.01.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