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 걸음 스무 걸음, 그리고 여름
박상순
너를 꼭 데리고 갈게.
나도 꼭 데리고 가줘.
내 몸속에서 자란 조개들을 꺼내
조개들의 입을 열고,
그 조개들이 한 입씩 베어 물고 있었던
내 몸속의 조각 구름을 만들고 ,구릉을 만들고.
단단한 조개껍데기들 위로 달리고 달려
고운 길을 만들고,
다시 또 구르고 굴러
더 곱게 반짝이는 모래를 만들고,
내 몸속에서 얼어붙은 얼음을 녹여
바다를 만들고, 이름을 짓고
수평선을 만들고, 여름을 만들고
내가 정말 싫어하는 강아지도, 너를 위해 한 마리는 만들고.
돛단배도, 고래도, 열대어도 다 만들어놓겠지만
움직이지 않는, 파도치지 않는,
숨쉬지도, 헤엄치지도, 흐르지도 않는
나의 돛단배, 나의 파도, 나의 고래, 나의 물고기, 나의 구름.
그래도 너를 꼭 데리고 갈게.
나도 꼭 데리고 가줘.
그냥 열 걸음, 스무걸음, 네 뒤에 있을게.
『슬픈 감자 200그램』(난다, 2017)
*
여름이라는 계절은 아무래도 낭만과는 떨어질 수 없는 계절인가보다.
여름을 소재로 한 시들 거의 대부분이 낭만적이고 환상적인 이미지를 추구하고 있다.
바다, 뭉게구름, 파도, 소나기, 매미울음소리, 녹음의 나무들, 수박, 잠자리, 비누방울, 자전거, 슬리퍼, 밀집모자, 원색의 매니큐어, 해바라기, 능소화, 바람개비...
생동감과 가벼움, 그리고 잠깐 나타났다 사라져버릴 것 같은 찰나의 속성 같은 것이 여름이라는 계절 속에는 있다.
밖은 햇살이 따갑지만 바람은 시원한 6월.
여름이라는 계절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는데 이상하게 이 시를 읽고나서는 좋아지게 될 것 같은 예감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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