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

소 / 김광규

kiku929 2018. 6. 26. 18:39



 



김광규

 




산비탈에 비를 맞으며

소가 한 마리 서 있다

누군가 끌어가기를 기다리며

멍청하게 그냥 서 있다

 

소는 부지런히 많은 논밭을 갈았고

소는 젖으로 많은 아이를 길렀고

소는 고기로 많은 사람을 살찌게 했다

 

도살장으로 가는 트럭 위에

소들이 가득 실려 있다

죽으러 가는지를 알면서도

유순하게 그냥 실려 있다

 

소들은 왜 끌려만 다니는가

소들은 왜 죽으러 가는가

소들은 왜 뿔을 가지고 있는가

 



-김광규 시집 우리를 적시는 마지막 꿈(문학과 지성사, 1979)중에서






*

내 자신은 이 소의 모습과 다르다고 말할 수 있을까?

나는 저 소의 모습에 자꾸만 내가 투영된다.


익숙해진다는 것, 길들여진다는 것은 그 일이 쉬운 일처럼 느껴지게 한다.


지금 내 앞에 있는 일들의 부조리를 알면서도 밖의 낯선 세상은 더욱 두려움일 수밖에 없으므로

침묵하는 경우는 없지 않았을까?


셀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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