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방울의 밑그림
박형준
잃어버린 바다의 주소록이 한 방울 물방울로 맺혀 있습니다. 가슴의 환한 고동 외에는 들려줄 게 없는 식물의 노래, 식물의 별입니다.
물의 씨앗들이 잠든 물방울은 길 끝에서 만난 저녁의 무늬입니다. 솟구치는 자세로, 막 저녁의 깁고 기운 빛을 입고 날아가는 구름 형상을
한 식물과 만난 밤은 날갯짓도 고요합니다. 똑똑뚜뚜르르르 내부의 가장 깊은 곳 어둠을 쳐 비스듬히 올라온 가지 위로 또 다른 물방울
성좌가 운행합니다. 버리고 버립니다. 물을 찾아 내려오는 짐승들 맑고 찬 눈동자에 떠도는 빛, 떨리는 걸음 하나만 남겨놓습니다. 어느새
사막의 모래먼지 두터운 마음이 씻기고 씻겨 거기 참한 한 별로 떠오르고 있습니다. 오색 물속에 피는 꽃잎들 쫙 펴 음악소리를 내줍니다.
저녁이 잘 비칩니다. 두 다리를 비틀리게 하는 그 음악 소리 자세히 들여다보면 딱딱하고 굳은 혀와 마른 등걸처럼 갈라진 세월 속에
솟구치는 무늬, 바로 내 버려진 어둔 날들의 황홀한 고동 소리입니다. 그러나 나는 물방울 속 깊이 감춘 그 시절 내 이름을 결코 찾지 않으
렵니다. 부르지 않으렵니다. 창턱에 턱을 괸 수염이 꺼칠한 외로운 청년 하나, 먼 곳 집의 눈꺼풀인 커튼이 어른거리는 저녁, 모두 빛과 물의
씨앗들로 등싯 부풀어갑니다.
- 『나는 이제 소멸에 대해서 이야기 하련다』(문학과지성사 1994)
가슴의 환한 고동 외에는
박형준
가슴의 환한 고동 외에는 들려줄 게 없는
봄 저녁
나는 바람 냄새 나는 머리칼
거리를 질주하는 짐승
짐승 속에 살아 있는 영혼
그늘 속에서 피우는
회양목의 작은 노란 꽃망울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눈꺼풀에 올려 논 지구가 물방울 속에서
내 발밑으로 꺼져가는데
하루만 지나도 눈물 냄새는 얼마나 지독한지
우리는 무사했고
꿈속에서도 무사한 거리
질주하는
내 발밑으로 초록의 은밀한 추억들이
자꾸 껴져가는데
- 시집 『생각날 때마다 울었다』(문학과지성사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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